Sunday, April 28, 2019

2019 부활절 예배

2019 부활절 예배























Friday, April 26, 2019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몇 년 전에 노사연 씨가 불러서 큰 사랑을 받았던 바램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 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때문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 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 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좋은 노래 가사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가 곁에서 들어주면, 크게 힘들거나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래 가사를 생각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서 내 이야길 들어주면 도움 되긴 하겠으나, 그런 기대 속에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릴 게 아니라 차라리 내 이야기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란 책에 소개된 미국 휴스턴대학 브레네 브라운 박사의 조언 때문이었습니다. 브라운 박사에 의하면, 참된 소속감은 타인과 함께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믿을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권면은 이렇습니다. “진정한 소속감은 자신을 굳게 믿고 자기 자신에게 속함으로써 가장 진실한 자신을 세상과 함께 나눌 수 있고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동시에 황야에 홀로 서는 정신적 체험이다. 진정한 소속감은 진정한 자신을 바꾸길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진정한 자신이 되길 요구한다.
흔히들 열등감에서 빠져 나오거나 자긍심을 키우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방법과 수단은 궁극적으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타인의 시선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자신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오전 잠시 짬을 내어 미용실을 찾았습니다. 머리카락이 고슴도치 털처럼 뾰쪽하게 서는 스타일인지라 손질할 시간을 조금만 놓쳐도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번엔 손질할 시기가 지났으나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미용실을 찾았더니 내 긴 머리를 보고서 주인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엔 목사님 머리가 꽤나 길었어요. 고난주간과 부활절 때문에 무척 바쁘셨나 봐요. 하지만 분주한 시기가 지났으니 좀 쉬세요. 오후에 잠시 낮잠이라도 주무셔요. 때론 쉬는 것도 필요해요.”
진심 어린 그의 말이 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쉬어가라는 속담도 있듯,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자.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하느라 무척 힘들었을 텐데, 내 안의 내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주는 시간을 갖자. 내 이야기를 나보다 누가 더 잘 들어주고 이해할 수 있겠나?”



2019. 4. 28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속장/인도자 모임이 오늘 2부 예배 친교 후 교육관에서 있습니다.

3. 주일성경공부(오전 9:30-11:00)가 ”마가복음의 발견 1” 교재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학습 동참을 희망자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4. 다음주일은(5월 5일)은 어린이주일이고, 12일은 어머니주일입니다.

5. 정기임원회가 다음주일(5월 5일) 2부 친교 후 AV Room에서 있습니다.

6. 북부지방회 연회가 5월 4일 오전 9시 30분에서 정오까지 밸리연합감리교회에서 있습니다.

7. 2019년 전국연합회 한인총회가 4월 29-5월 2일까지 남부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에서 있습니다. 담임 목사께서 참석하십니다.

8. 교회 재산권 상환 논의를 위한 지방회와 만남이 4월 30일 오후 3시 30분에 시미밸리연합감리교회에서 있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9.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적극적 동참을 바랍니다. 

10.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April 23, 2019

산 자는 무덤에 머물지 않는다




산 자는 무덤에 머물지 않는다
(LK) 24:1-12 (2019 4 21일 부활주일)
안식 후 첫 날, 즉 주일 이른 새벽 시간에 몇 명의 여자들이 미리 준비한 향료를 바구니를 가지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덤을 봉하고 있던 큰 돌이 저 멀리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살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황당한 일로 인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섰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인들이 얼굴을 땅 아래로 숙였습니다.
그때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하셨느니라”(5-7).
두 사람의 말은 그 여인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했고,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무덤에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성 안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열한 사도들과 나머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노라면, 준비한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가던 여인들은 무덤의 큰 돌이 멀리까지 굴러진 것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또한 무덤 안에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서 또 다시 크게 놀라며 심히 큰 근심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무덤의 돌이 굴러진 것과 그 안에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서 그들이 놀라고 근심한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그들이 아직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3, 4).
예수께서 장사 된 후 삼 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믿었다면, 무덤의 큰 돌이 멀리까지 굴러져 있는 것과 그 안에 시신이 사라진 것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크게 기뻐했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고로 부활의 강력한 증거를 두 눈으로 보고서도 그들은 놀라고 큰 근심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과 믿지 못한 것의 차이가 바로 이렇게 나타납니다.
믿는 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의 주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의 증인들이 모여 부활의 구체적 증거를 나누고, 그 증거를 타인에게 전함으로써 부활의 희망을 세상에 널리 전염시키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의 모임입니까?
어느 통계자료를 보노라니,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사후 부활에 대한 확신이 86%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신앙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후 부활은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믿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 자신의 실제 삶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과거 사건에 관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오늘의 사건, 곧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의 부활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부활을 옳게 믿는 것이고, 그것이 참된 부활신앙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의 부활이 우리 자신의 부활사건으로 이어진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부활을 믿으면, 고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부활을 믿으면, 절망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부활은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찾도록 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참된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곧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서 그것을 우리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두 천사가 여인들에게 전한 말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하셨느니라”(6, 7).
참된 부활신앙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예수께서 친히 하셨던 말씀을 부활의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죽어 장사 된 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건대,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로 다른 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또한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이것을 그 여인들은 기억하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을 우리 역시 기억하고서 믿어야 합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가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가 노방 전도를 하던 어느 날 그의 설교 도중 이슬람 교도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갖지 못한 것 한 가지를 우리는 가졌소.”
그래서 존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이슬람 교도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우린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그의 말에 존스 선교사가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말이 그대로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빈 무덤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적 믿음은 산 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산 주를 믿습니다. 죽었으나 다시 부활한 자를 믿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주를 믿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 무덤 속에서 더 이상 낙심하고 근심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가 여전히 죽어 있다면, 그의 시신, 그의 뼈가 여전히 무덤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뼈를 볼 때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분의 희생을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과거 사건에 대한 추억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께서 삼 일 후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의 큰 돌을 멀리까지 내던지시며 밖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무덤 안에 그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이곳 저곳 아무리 살핀들 그 여인들은 그분의 시신을 결단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관한 예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수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편지와 돈이 동봉되어 왔습니다. 죽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달라는 한 여인의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색이 완연한 늙은 부인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아들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아주려고 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내가 앞으로 몇 주밖에 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관리인은 말없이 그 여인을 쳐다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이 말했습니다. “부인, 돌아가신 아드님을 위해 꽃을 사라고 보내주신 부인의 돈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으로 유감으로 생각했습니다.
“유감이라니요?
“유감이지요.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꽃을 보거나 향내를 맡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꽃을 볼 수도 있고, 향내를 맡을 수도 있지만, 이 무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인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 되돌아갔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인이 다시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나는 직접 꽃다발을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몹시 기뻐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의사는 어떻게 내가 다시 건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삶의 목표를 다시 찾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면,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믿음은 공허한 것이 될뿐더러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 삶에 그친다면,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고전 15:17-19. 쉬운성경).
“성경이 남겨 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우리는 부활을 믿어 나사렛 예수를 믿을 수 있고, 부활을 믿지 않아 나사렛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한 브레넌 매닝의 말은 옳습니다. (저서: 아바의 자녀, 부랑아복음, 그대는 주님을 따르려거든,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이름 예수, 기타 등등).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5, 6). 성도 여러분, 산 자를 죽은 자 가운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곧 그는 우리의 불신앙의 무덤, 불순종의 무덤, 의심의 무덤, 두려움의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도 더 이상 무덤 안에 머물러 있어선 아니 됩니다.  불신앙의 무덤, 불순종의 무덤, 의심의 무덤, 두려움의 무덤에 머물러선 아니 됩니다. 부활신앙과 함께 무덤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을 들은 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선 곧바로 무덤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무덤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인지, 아니면 무덤에서 빠져 나올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덤, 즉 불신앙, 불순종, 의심,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시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자를 찾는 신앙에서 이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신 자를 찾는 신앙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래서 설령 현재 삶이 고난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해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아멘?

The Living Never Stay in the Grave




The Living Never Stay in the Grave
LK 24:1-12 (April 4, 21. Easter Sunday)
On the first day after the Sabbath, that is, early in the morning of Sunday, several women were heading to the grave of Jesus with some spices that they had prepared. They were Mary Magdalene and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several others.
As arriving at the grave, they witnessed an amazing sight. The large stone sealing the tomb was moved away. So, with fear, they went inside and found the Lord Jesus’ body was gone.
They stood there puzzled, trying to think what could have happened there. Suddenly two men appeared before them, clothed in shining robes so bright their eyes were dazzled. Therefore, the women were terrified and bowed low before them.
Then the strangers asked, “Why do you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He is not here; he has risen! Remember how he told you, while he was still with you in Galilee: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gain’” (vss 5-7).
The message from the two men reminded the women of what Jesus had said when he was still alive, so they hurried to come out of the grave, and ran into the city to tell the eleven apostles and to all the other believers everything they had seen and heard at the grave site.
In the text today, the women who visited the graveyard with spices they had prepared were surprised to see that the large stone had rolled away from the tomb. Also, when going inside, they found no dead body there, and in return they were amazed and greatly worried.
Why, then, why were they so troubled to see that the stone of the tomb was rolled and that the body had disappeared from the grave? The crucial explanation is this: It was because they did not believe in Jesus' Resurrection yet. “[B]ut when they entered, they did not find the body of the Lord Jesus”(vs 4).
If they believed that Jesus was going to be raised three days after his death and burial, they should have rejoiced as witnessing those marvelous scenes. But for they have not yet come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they were greatly surprised and distressed even after the strong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were before their own eyes. This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can believe in Jesus' Resurrection and those who cannot.
We believers must witness the Resurrection of Jesus to the world. Of course, believing in the Resurrection means believing in the Lord who has risen. God’s Church is a faith community that the believers come together and share the specific evidences of the Resurrection and scatter hope to the world by spreading the news of the Resurrection to the people. If so, are we a faith community who are witnessing the Resurrection to the world?
A survey reports that more than 86% of the Christians in Korea said they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fterlife. However, there are not many who actually live as if they are resurrected in their physical days here. What does it mean? They can believe in resurrection afterlife because it is what the Bible is teaching, but they think its event is what belongs to God only and it is not what they should be concerned in this life.
Belief in the resurrection doesn’t mean only thinking of a past event. The Resurrection of Jesus must become today's event, that is, our own resurrection experience now. That is a real conviction of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that is a true faith in his Resurrection.
Of course, the Resurrection of Jesus took place 2000 years ago, but if his Resurrection becomes for us right now, the story will be total different. 
If we are sure of the Resurrection, we can understand our sufferings in a different point of view. If we believe in the resurrection, we can see our despairing situations differently. The Resurrection will help us to find hope even in our sufferings and despairs. Being assured of the Resurrection is also being confident that there is more than what we see, hear and experience in our life now. Brothers and sisters, are we true believers of the Resurrection?
How then can our beliefs in the Resurrection become real? How can we become more confident of Jesus' Resurrection and accept it as an event for our lives now? The answer can be found in the words that the two angels said to the women: “Remember how he told you, while he was still with you in Galilee: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gain’” (vss 6, 7).
True faith in the Resurrection is to be assured and accept what Jesus had said. The angels presented Jesus' own words as a strong proof of his Resurrection. The Lord said, “I will be killed and buried, but I will rise again in three days.”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just as he had said. Thus, the angels did not present the women anything as an evidence of his Resurrection, other than Jesus’ own words.
That's right. The Resurrection of Jesus took place just as prophesied in the Bible, and also as promised by Jesus himself in advance. That was what those women had to remember and believe. Likewise, that is what we have to remember and believe as well.
It happened when American Methodist missionary Stanley Jones was still doing his missionary work in India.
One day when he was preaching at the street, during his sermon a Muslim shouted, “We have one thing that you Christians don’t.”
So Jones asked, “What is it?”
Then the Muslim replied liked this: “When we go to Medina, we have a coffin containing the corpse of Mohammed, so we can be sure that there has really been a real person called Mohammed in history. But if you Christians go to Jerusalem, you can see nothing but an empty tomb.”
Jones answered, “Thank you for saying that. What you’re saying is true. But that is the uniqueness of Christianity. Our Lord has resurrected. That’s why we have only an empty tomb of Jesus.”
Christian faith is all about the Living Lord. We Christians believe in the Living Lord. We believe in the One who was dead but resurrected. We believe in the One who is still alive and lives forever, and we worship Him. Therefore, we cannot remain and suffer any longer in our graves of discouragement and grief. It is for the reason that our Lord is no longer in the grave.
Of course, if he is still dead, his body, his bones would be found in his grave. So every time we see those remains, we will be thankful for his sacrificial death for us.
But Christian faith is more than of our memories about all the great events of the past. By the power of God, the Lord, who was crucified on our behalf, rose from the dead three days later. He pushed the big stone of the tomb far away and walked out. So there remains no dead body in his tomb. No matter how thoroughly the women were searching in the tomb, his body was found from nowhere. The Living doesn’t stay in the tomb any longer.
Let me tell you an illustration of the way of life that we as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are supposed to live by:
There was a grieving mother who sent letters and money to a cemetery custodian every week for a several years. She asked him to buy fresh bouquets and take them to the grave of her dead son.
One day, however, the lady whose face looked seriously ill, came to the cemetery with a large bouquet of flowers by herself and said to the custodian, “Today I came to deliver a bouquet to my son by myself because my doctor said that I would live not too long, perhaps only in a few weeks only.”
The custodian looked at her silently and said, “Ma'am, I was sad whenever I received the money to buy flowers for your deceased son.”
“What were you sorry for?”
“It’s true that I should be sorry for no one in the cemetery could see or smell the flowers I bought on behalf of you. But those who are in the hospital can truly love the flowers. They can see the colors of the flowers and enjoy their smells, but can no one here do.”
The lady went home after standing there silently for a long time. Then a few months later she came back and told the custodian as follows: “You were right. I bought flower bouquets and delivered them to the people in the hospital by myself. They were very pleased, and I was happy too. My doctor doesn’t know how I got better and healthy again, but I know it for sure. Now I have found my life’s goal once again.”
If we are subordinated to the past, we need to listen carefully to what the Apostle Paul said, “And you are very foolish to keep on trusting God to save you, and you are still under condemnation for your sins; in that case, all Christians who have died are lost! And if being a Christian is of value to us only now in this life, we are the most miserable of creatures” (1 Cor 15:17-19, LB).
What Brennan Manning claims is correct: “There are only two paths the Bible has left. We believe in the Resurrection and can believe in Jesus of Nazareth, or we don’t believe in Jesus of Nazareth for we cannot believe in his Resurrection.”
 “Why do you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He is not here; he has risen!” (vss 5, 6). Dear brothers and sisters, we must not be fooled to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The Lord of the Resurrection stays in the grave no longer. He is never trapped there.
Our Lord is not trapped in our graves of unbelief, disobedience, doubt and fear. Jesus broke the power of death and walked out of the darkness on foot. Therefore, we better not stay in the dark places, either. We cannot remain in our graves of unbelief, disobedience, doubt and fear any longer. We must walk out with the confidence of the Resurrection.
The women in the text today heard the angels and remembered what Jesus had told them, and in return they walked straight out of the grave. Now we must decide whether we will remain in the grave, or walk out immediately. Will you come out of your unbelief, disobedience, doubt and fear right now?
Dear brothers and sisters, we should all move from a faith to seek the dead to a faith to look for the Living Lord who has died for us but risen again for us. Therefore, even if the present circumstances are still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despair, we can find ling hope because we are sure of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Amen?

Friday, April 19, 2019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란 명작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틀에 박힌 아이로 자라난 싱클레어가 동년배 아이들보다 성숙해 보인 데미안이란 친구와 만나고 그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한 성인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데미안으로부터 이런 글을 받고서 그의 내면의 눈이 활짝 뜨입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싱클레어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선 반드시 고정 관념과 기존 습관이란 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새가 밖으로 나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보호해준 껍질을 깨뜨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알 속에서의 생활이 습관화 되었기에, 그곳에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알을 깨고 빠져 나가는 고통을 껴안아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새가 새답게 넓은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긍정적 변화는 껍질 속에 생명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전제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그 속의 것이 죽은 것이라면, 결코 그 어떤 것도 껍질을 깨고서 밖으로 빠져 나올 순 없겠죠.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셨습니다. 죄의 멍에 짓눌린 채 멸망으로 질주하던 인류에게서 저주의 사슬을 벗겨내고 희망찬 약속의 세계로 인도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원대한 꿈의 성취를 위해 그가 감당할 대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인데,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대신하여 그 자신이 죄(죄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끔찍한 형벌로 인해 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삼일 후 아침 그 시신을 봉하고 있던 거대한 무덤 돌이 안에서부터 밖으로 내던져졌고, 안에 있던 자가 무덤 문을 부수고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죽은 자의 몸에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곧 죽은 자에게 생명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산 생명은 무거운 무덤의 돌을 멀리까지 내던진 후 밖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구주이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한 날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언젠가부터 부활절이면 교회에서 달걀을 나누어주는 관습이 생겼는데, 그것은 주님의 부활을 껍질을 깨고 나온 생명을 비유해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달걀 속 생명체는 반드시 껍질을 깨고 나와야 새로운 삶을 펼칠 수 있습니다.



2019. 4. 21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이 준비되어 있사오니 모두 함께 하기 바랍니다.    We welcome today’s visitors and friends: We are glad you chose to worship with us this glorious morning of Easter. 

2. 오늘 주님의 부활을 함께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 갖기 바랍니다.    Today let us celebrate the Lord’s Resurrection and be joyful together.

3. 십자가 장식용 꽃을 가져오신 분은 예배 전 앞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에 꽂아주시기 바랍니다.    Whoever brought flowers for the Cross, please place them on it prior to the worship service.

4. 주일성경공부(오전 9:30-11:00)가 ”마가복음의 발견 1” 교재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학습 동참을 희망자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Sunday Bible Study is ongoing from 9:30 – 11:00 AM every Sunday.

5. 북부지방회 연회가 5월 4일 오전 9시 30분에서 정오까지 밸리 연합 감리교회에서 있습니다.
   North District Annual Conference will be held at Valley Korean UMC, 9:30 AM-Noon, May 4.

6.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적극적 동참을 바랍니다.   Let us all work together for the continuance of the wonderful ministries of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9.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Sunday, April 14, 2019

내려놓음





내려놓음
(Isa) 53:1-12; (MT) 4:1-11 (2019 414일 주일예배. 종려주일)
교만한 당나귀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한지라 무척 멋지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왕과 함께 그 나귀에게도 갈채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큰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습니다. 백성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이 없으면,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화가 난 왕이 즉시 나귀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에 말씀 드렸던 예수님의 40일 광야훈련을 여전히 기억하시나요? 사실 그 광야훈련의 주제는 내려놓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권리와 영광까지 모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광야 금식기도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안위, 명예 그리고 영화를 위해 신적 지위와 권능을 사용하라는 사탄의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자신을 위해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삶의 안락함을 추구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인기와 명예를 좇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만일 네가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모든 나라를 너에게 주겠다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부귀영화를 좇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물론 예수께는 자유의지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실 광야 40일 금식을 하며 예수께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본분이 있었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그 본분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하셨다면, 최고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굳이 사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이 그에게 온통 쏠렸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일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이 우리가 기다렸던 그 메시아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그를 환영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길 위에 펼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꺾은 나뭇가지를 펼쳤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걸어가던 사람들과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이 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이 화답했습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복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1-11).
그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으나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관심과 높은 인기를 자기 자신을 위해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몸을 원수의 손에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껴안았습니다. 야유를 받고, 침 뱉음 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창에 찔렸습니다.
그 당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의 처참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2, 3)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그가 세인의 관심과 인기를 뒤로 하고 굳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며, 고난을 받아야 했던가요? 그 대답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 6)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 죄악의 대가가 그토록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가 우리 죄 된 것입니다. 우리 죄가 그토록 엄청난 징벌을 그에게 불러왔던 것입니다.
예수께 우리 죄를 전가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위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는 기꺼이 내려놓으셨습니다. 부귀영화, 자기 만족, 행복 추구 등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란 의식조차도.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었습니다.
C.S. Lewis스크루테잎의 편지이란 책에 보노라면, 우리 인간의 뜻을 부추기는 사탄의 끊임 없는 유혹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스물 한 번째 편지에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 만한 가치가 있지. 인간들은 노상 제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릴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
현대세계가 순결에 그렇게나 반발하는 것도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육체라는 광막하고 위험천만한 땅, 세상을 만들어 낸 에너지가 고동치는 그 땅에 자신들의 동의로 거하게 된 것도 아닐 뿐 더러, '다른 이'의 뜻에 따라 그 땅에서 물러나야 하는 주제에 말이지!
이런 인간의 착각은, 어떤 왕이 아들을 사랑해서 거대한 영토의 명의를 준 후 실제 통치는 현명한 조언자들에게 맡겼는데, 막상 그 아들은 놀이방 바닥에 널린 집 짓기 장난감들처럼 그 모든 도시와 숲과 곡식도 진짜 제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나 진배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불어넣는 데에는 교만 말고도 혼동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이 소유격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거지. '내 장화' 로부터 시작해서 '내 개', '내 하인',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상관', '내 나라'를 거쳐 '내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달라지는 그 의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인간들을 잘만 가르치면 이런 의미들을 모조리 '내 장화'와 같은 뜻, 즉 소유를 나타내는 ''로 국한 시킬 수 있다.
인간이 완전히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나오지 뭐냐. 종국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모든 인간에 대해 원수나 우리 아버지 둘 중 한편이 '내 것'을 주장하게 될 게다. 그러니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인간들도 결국엔 자기 시간, 자기 영혼, 자기 육체가 과연 누구 것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여하한 경우에도 저희들 것은 절대 될 수 없지.
이렇게 볼 때, “지옥의 단 한 가지 법칙, ‘나는 내 것이다’”(조지 맥도널드)란 말이 옳아 보입니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말년에 뮐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선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16:24).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영적 필요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연습이 지속될 때, 우리 마음에 참된 자유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4:7, 8)
성도 여러분, 거룩이란 말이 있죠? 거룩은 실제로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지 평가할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입니다. 곧 삶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좇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내려놓음을 잘 표현하는 기도문이 있어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들려지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각과 말 속에 계시옵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고도 조용한 노력 속에 계시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허하고도 성실한 수고 속에 계시옵소서.
과장도 아니고, 허식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버려진 자들을 불러 모으시나이다.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머지않아 내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곧 다가올 풍성한 영광, 완전한 영광을 내가 보리니,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내 모든 소원을 이루시며,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나의 전부가 되시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그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Friday, April 12, 2019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함께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함께


어느 날 성 프란시스가 울면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왜 우시느냐?”고 묻자 프란시스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울고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땅 끝까지 헤매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성 프란시스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여, 내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첫째, 내 영혼과 육체가 괴로움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맛보게 하옵소서. 둘째, 우리 죄인들을 위해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당신의 그 타는 듯한 사랑을 나도 가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오늘은 수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공생애 3년을 마친 후 그 동안 수도 없이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생각을 좀처럼 헤아리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길바닥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고, 어떤 이들은 야산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 흔들면서 성으로 입성하는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9-10) 그날 예루살렘엔 그들의 환호소리로 크게 진동했습니다.   
이날 주께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셨기에 매우 기쁜 날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주간이 일어나게 될 숱한 일들, 그리고 골고다 십자가 죽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간은 예수님께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력으로 이 기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영어로는 “Holy Passion Week”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온갖 고난을 몸소 당하신 후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그의 고난에 부분적으로나마 동참하고자 힘쓰는 영적 순례에 동참할 것을 권유 받습니다.
그렇다면 이 특별한 주간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물론 고난주간이라고 해서 엄청난 고통거리를 만들어 뒤집어 쓸 필요까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주간에 주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묵상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심정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육체적 여건이 허락된다면, 하루 한끼를 금식하고, 필요에 처한 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도 좋습니다. 가능한 한 TV 오락 프로그램을 삼가고, 게임이나 채팅을 삼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금주 월-토요일까지 있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도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뜻 깊은 노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며, 지극히 기쁘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힘써 동참한 만큼 부활의 기쁨 역시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2019. 4. 14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은 고난주일/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예배가 내일 월요일(4월 15일)부터 토요일(20일)까지 오전 6시에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계기를 삼기 바랍니다.

3. 성 금요예배가 4월 19일(금) 오후 8시에 성전에서 있습니다.(4월 17일은 “침묵의 날”로 지키며 수요저녁예배는 없습니다).

4. 금년 부활절예배는 돌아오는 주일, 즉 4월 21일(주일)입니다.1부와 2부가 합께 오전 11시 30분에 예배합니다.
• 세례/입교예식이 있습니다. 세례나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담임 목사님께 연락바랍니다.
• 제단장식을 위한 백합화분을 기증받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예배에      오실 때 가정별로 십자가 장식용 꽃을 가져오기 바랍니다.

5. 주일성경공부(오전 9:30-11:00)가 ”마가복음의 발견 1” 교재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학습 동참을 희망자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6. 북부지방회 연회가 5월 4일 오전 9시 30분에서 정오까지 밸리 연합 감리교회에서 있습니다.

7. 2019년 전국연합회 한인총회가 4월 29-5월 2일까지 남부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이철구 목사 담임)에서 있습니다.

8.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적극적 동참을 바랍니다. 

9.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Sunday, April 7, 2019

내 이야기가 아닌 그분 이야기를





내 이야기가 아닌 그분 이야기를
고후 4:16-5:10 (2019 4 7일 주일예배(많은 내용을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인용)
이 땅에서 살아가노라면, 우린 크고 작은 숱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미래지향적 선택을 하면 좋겠지요. 미래 지향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질문은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첫째 유형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곧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자기 중심적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로 들어, 찬양 집회나 특별 세미나에 참석하길 좋아하는데, 그런 곳에서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집회나 선교활동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필요와 축복 그리고 자기 행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또한 그의 믿음은 ‘나 우선(me-first)’입니다. 곧 하나님의 목적보단 자기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은 구원 받은 자로서 섬기는 사명을 늘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로 부름 받았음을 깨닫게 되면,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단 기뻐합니다. 세상 속에 변화를 불러오는 일에 함께 한다는 자부심 때문에 열정이 있고, 기쁨과 자신감으로 넘쳐납니다. 물론 그의 뜨거운 열정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린 과연 어떤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길 희망해야 할까요?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위대하고, 중요한 일에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다름이 아닌 그분의 이야기, 즉 그분의 나라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억했으면 합니다. 역사(History)는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그분의 이야기(His story)입니다. 영원히 함께 존재할 가족을 만들려 하나님께선 오늘도 일하십니다. 또한 그의 거룩한 일로 여러분과 나를 초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할 것 같으면, 때가 차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가 꿈꾸는 위대한 일이 멋지게 펼쳐질 것입니다. 그때엔 모든 인종, 민족, 국가 그리고 언어”( 7:9)의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그를 찬양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되어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마지막 때 성취될 천국의 삶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참으로 멋진 기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두 가지로 정리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하는데 있어선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고전 14:20, 쉬운성경).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단계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자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성인이 되어가면서 다른 이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명하십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 2:4).
물론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자기 중심적이고, 삶 속에서 자주 접하는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으로 생각하도록 부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야기, 즉 그분의 거룩한 사업에 동참하고픈 사고전환이 쉽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사고전환이 가능하도록 돕는 방법은 순간순간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도록 방치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고전 2:12, CEV).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믿지 않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눌 때, 전도를 늘 염두에 두고서 그들이 영적 필요를 느끼게 해달라고 성령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잊지 말고 이 기도를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조용히 속으로 하는 기도습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 들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로 하여금 깨닫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또한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그들이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했는지를 파악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시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전 10:33).
또한 우리는 선교지에서 전도와 선교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기도 동역자들에게 권했습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고후 1:11).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신문과 뉴스를 지상명령을 완수하기 위한 관점에서 읽고 듣는 것입니다. 사회와 나라에 어떤 변화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코자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긴장 상황이나 전환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욱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분히 인식했다면, 이젠 우리는 본격적으로 실천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깊은 곳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둘째로, 지금 여기만 바라보는 사고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사고를 품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은 영원한 관점을 항상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사소한 일에 너무 큰 비중을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급한 것과 궁극적으로 중요한 일을 구분 짓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8).
가만히 우리 삶을 돌아보노라면, 우리가 시간과 힘을 쏟아 붓고 있는 대부분의 일은 일 년 혹은 이 년 후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시간이란 관점에서 볼 땐,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중한 삶을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과 맞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측면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9:62).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6:20)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제부터 어디에 보물을 쌓아두시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6:9).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는 돈으로 친구를 사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가지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천국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그들이 우리를 반겨줄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빈 손으로 떠나는 인생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혹시 그 말에 동의하십니까?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천국으로 발걸음을 향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투자함으로써 천국에 보물을 쌓아둘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로 고민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정체성(identity)의 문제입니다. 둘째, “내가 과연 중요한 존재인가?” 이것은 삶의 중요성(importance)의 문제입니다. 셋째, “삶 속에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 이것은 영향력(impact)의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 답을 찾으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찾고 있습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다섯 가지 목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린다
·         다른 믿는 자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린다
·         맡겨진 은사를 잘 활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 13:17).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지 깨달았다면, 우리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의 다섯 가지 목적을 잊어버린 채 많은 이들이 혼돈의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그 중요한 목적으로부터 멀어진 채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목적을 상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목적 선언서를 작성하고서 그것을 정기적으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기자가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네가 가는 방향을 제대로 알면, 그 기본 방향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4:26, CEV).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릭 워렌 목사께서  삶의 목적 선언문 예를 몇 개 적어놓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렇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며, 그리스도에 대해 나누고,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며, 나의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항아리를 이용해서 원숭이를 잡는 남미 인디언 부족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부족은 원숭이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목이 좁은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바나나를 넣어둡니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원숭이들이 다가와 항아리를 살피다가 안에 바나나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서 손을 집어넣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그런데 항아리의 목이 좁아서 원숭이가 주먹을 쥔 상태에서는 손이 빠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숭이는 바나나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눈만 멀뚱거릴 뿐입니다. 인디언들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은 것일까요? 아니면 바나나가 원숭이를 잡은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항아리 속 바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나나를 손에서 놓는 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붙잡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 2. 33)
그런데 만약 우리가 여전히 세상적인 것에 집착한 채 살아간다면, 다음의 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언젠가 이 땅에서 우리 삶은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삶은 지속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중도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수고에 대한 영원한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서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말하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1925년 노벨상 수상자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95세의 삶을 산 후 자신의 묘비에 새겨질 문구를 이렇게 새겼답니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위대한 교육가로 알려진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1745~1827)의 묘비명은 이렇게 쓰여졌습니다. "모든 일을 남을 위해 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해 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 축복이 있기를!"
참으로 멋진 묘비명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뒤에 남겨진 이들이 우리 무덤에 어떤 묘비명을 세워줄까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성취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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