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7, 2019

나그네 대접하길 힘쓰는 교회






나그네 대접하길 힘쓰는 교회
창세기 18:1-8; 히브리서 13:1-2 (2019 1 27일 창립39주년 감사예배) 
어느 날 지인 몇 분과 함께 어느 식당에 식사하러 갔을 때의 경험담입니다.
한창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던 한 여자 분이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갑자기 일어서더니 자신의 식탁을 양보했습니다. 푹신한 쿠션 의자가딸려 있는 그 자리는 우리 일행이 마주 앉아 대화 나누기에 최적소였습니다. 자신의 식탁을 양보하는 그분께 우린 괜찮다고 극구 사양했습니다. 하지만 읽고 있던 책을 접고서 그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고맙다고 말한 후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린 그 여자분이 식당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가 자리를 양보할 이유까진 없었습니다. 그곳 종업원이 들어오는 손님마다 적당한 자리로 안내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곳에 들어갔을 때, 식당은 거의 비어 있었기에 우리가 앉을 자리는 많았습니다.
우리 일행의 편의 차원에서 자기 자리를 양보한 그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우리에게 다가와 식당을 소개하는 친절도 마음에 썩 들었습니다.
실은 그날 음식 맛은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손님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가 인상 깊게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도 기회가 될 때 그곳에 가서 식사하곤 했습니다.
주변 식당들을 살펴보노라면, 크게 두 부류입니다. 첫째는 당골 손님들을 위한 식당입니다. 그곳에선 당골 손님이 왕입니다. 당골 손님은 주인으로부터 환대를 받습니다. 오랜 손님이 들어오면, 식당 주인은 큰 허그와 함께 그를 맞습니다. 주인과 당골 손님 사이엔 격이 없어 손님이 마치 주인처럼 보입니다. 주인이 너무 바쁘다 싶으면, 손님이 직접 커피대로 가서 커피를 가져다 마십니다.
사실 당골 손님은 음식 맛, 가게 장식 분위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게 아닙니다. 그 식당이 마치 자기 집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당골 손님 위주의 식당은 새로운 고객 유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주인이 환대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새로운 손님이 아닌 당골 손님입니다.
때론 방문객이 앉아 있으면, 오히려 주인과 당골 손님에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식당 주인은 굳이 새로운 손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충성스런 당골 손님만으로도 장사를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당골 손님들은 식당 구조를 훤히 다 압니다. 그래서 굳이 화장실 표시판이 붙어 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손님들이 식당 주인과 종업원들을 모두 알고 있기에, 종업원들은 굳이 유니폼을 입거나 명찰을 착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메뉴판도 세련되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손님들은 그곳 음식을 잘 알기에, 어떤 음식을 주문해야 할지 압니다. 물론 주인 역시도 손님의 입맛을 훤히 알고 있어, 굳이 무엇을 먹겠느냐고 물을 이유도 없습니다.
한편으로, 둘째 부류 식당은 새로운 손님을 위한 식당으로써 고객을 끌어들이려 여러 가지 시도를 합니다. 손님의 호감을 사려고 계절에 따라 식당 분위기에 적절한 변화를 줍니다. 어느 손님이든 들어오면, 다가가서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손님이 화장실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싸인판을 잘 붙여놓습니다. 메뉴판도 최대한 깔끔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종업원인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종업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이름표를 부착합니다.
당골 손님들은 당골 식당을 즐겨 찾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나, 그 식당을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당골 손님 위주의 식당보단 새로운 방문객 위주의 식당을 선호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첫째는, 당골 교우들, 즉 기존 성도들 위주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훈훈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압니다.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성도들이 굳이 명찰을 붙일 이유도 없습니다.
온 성도가 교회 구조에 익숙한 고로 굳이 화장실 싸인판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장비나 구조물이 예배에 방해가 되더라도 성도들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한 교회 구조에 자신을 맞춥니다.
안내 위원이 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예배 드리러 오는 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주보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고, 어느 곳으로 가서 앉아야 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존 성도들 위주의 교회에 새로운 사람이 방문하면, 상황은 무척 다릅니다. 그들에게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 방문한 곳인지라 어색하기만 한데, 교회 구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배 순서도 어색하고, 모든 게 불편할 뿐입니다.
혹시 방문자가 교회에 왔을 때 어디가 어딘지 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계시는지요? 방문자는 기존 성도들에게 맞추어진 예배 순서를 따라가는 게 낯설고 힘들기만 합니다.
본 교회 부임 후 첫 번째 드렸던 예배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날 예배 때 매우 불안했습니다. 내가 목사이기에 어떤 예배 순서이든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목사는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어떤 예배라도 알아서 집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첫날 예배 때 아무도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교회 담임 목회자로 왔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질문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현실적 문제는 누구에게 가서 예배에 관해 여쭈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는 방문자 위주의 교회인데, 그런 교회는 모든 게 다릅니다. 이런 교회는 방문자가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교회가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교회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방문자 전용 주차 공간이 지정되어 방문자가 가장 좋은 곳에 주차할 수 있습니다. 건물 싸인판이 여기저기 잘 붙어있기에 성전, 화장실, 교육실, 그리고 사무실이 어디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 접근하노라면,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안내원이 있고, 그가 건네주는 주보를 받은 후 앉을 자리로 안내 받습니다. 예배 순서도 복잡하지 않기에 처음 참석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배 후 성도들이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말을 건네주기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친교실에서 커피나 빵을 나누며 사귐을 갖기에 마치 전에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나는 느낌을 갖습니다. 결과적으로, 방문자는 기회가 되면, 다시 그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는 어떤 유형의 교회일까요? 당골 성도, 즉 기존 성도 위주의 교회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사람, 혹은 방문객 위주의 교회인가요?
기존 성도 위주의 교회나 방문객 위주의 교회나 둘 다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안식처를 찾고 있는 교회 밖의 영혼들이 선호하는 교회는 당연히 방문자 위주 교회일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과 방문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 자세 그리고 예배형식을 다시 신중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손님을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방문자가 오면, 그를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최고로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장막 문을 열어 열어 놓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게 되면, 달려 나가 그를 자기 장막으로 초대해 최대한 환대를 베풀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노라면, 아브라함은 길을 가던 나그네들을 자기 장막으로 초대해 그들에게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무 그늘 아래 편히 앉아 쉬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쉬고 있는 동안 아브라함은 급히 빵과 고기를 요리해 가져다 주었습니다.
길가는 나그네들을 그저 건성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이렇게 보건대, 아브라함은 우리가 방문자들을 어떠한 태도로, 또한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왜요? 아마도 그 이유는 아브라함 자신 역시도 나그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했다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대접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임을 아브라함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을 몰랐음에도, 그는 그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는데,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런 권면을 베풀고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13:2).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8:10). 그의 나이 100살이 되었을 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아들을 마침내 얻게 될 것이라는 확약을 들은 것입니다.
그에게 임한 축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죄악 때문에 유황불로 멸망 당할 것이라는 긴급한 소식을 하나님으로부터 듣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와 조카의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고, 결국 조카의 가족을 유황불 심판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사람들과 방문자들을 정성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에 머무는 동안 힘들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를 아낌없이 제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방문자의 눈으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방문자가 불편해 할 요소는 없나를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손님을) 대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대접하라는 말은 영어로 “to entertain”입니다. 방문자들이 방문한 동안 최대한 편안하고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방문자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갖도록 주차 정리, 예배 순서, 영접 활동, 교회 안내판 등에 최대한의 신경을 써야 합니다. 교회에서 방문자가 왕으로 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버릇 나빠진다고요?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린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손님이 주인이다!” 회사의 표어로 많이 쓰이는 구호입니다. 교회 역시 방문객들을 대할 때, 이 표어를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방문객은 교회의 주인이다!”
하와이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오하이오(Ohio) 주의 팁 시티(Tipp City)에 소재한 스틸워터 연합감리교회(Stillwater UMC)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한적한 시골동네에 위치한 고로 교회는 온통 옥수수 밭으로 둘러싸였습니다. 교회 주차장에 서서 바라보니까 몇 채의 집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교회 토요예배와 주일예배에 몇 명이 참석하는지 아십니까? 6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몇 천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믿겨집니까? 옥수수 밭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골 교회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까?
비결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방문자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옆에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 장난감들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지루해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부모들은 옆에서 편안히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그리고 성공한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힘쓰는 교회가 아닐까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지 않나요?
이제 우린 창립39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40주년을 맞습니다. 40년이면 강산이 무려 네 번이나 바뀐 셈입니다. 이젠 기존 성도들을 교회가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영혼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우리와 더불어 예배할 수 있는 주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를 위한 사랑은 말과 행동이 함께 동반할 때 비로소 온전히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Friday, January 25, 2019

창립 39주년을 맞이하여




창립 39주년을 맞이하여
우드랜드힐스연합감리교회(사랑나무교회)가 오늘 창립 39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사실 우리교회가 39살이 되었단 의미인데, 이것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내년이 되면, 불혹(不惑, 40)의 나이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불혹(不惑)”은 공자가 “4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 일에 미혹됨이 없었다고 술회했던 것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주변정세에 현혹되어 이리저리 휩쓸리기보단, 자기 자신의 사고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서 다가오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절히 대처할 연륜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곧 불혹으로 접어드는 기로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써 우리는 주변상황으로 인해 더 이상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모든 관심과 열정이 온전히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젠 미래를 위한 원대한 꿈을 꾸었으면 합니다. 샌 퍼르난도 밸리지역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영역을 복음으로 점령하겠다는 꿈을 갖고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자는 현재 우리 모습을 보아라. 교세도 작은데, 그런 꿈을 꾸는 것은 가당치 않다. 주제파악이 최우선이다라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 당장 교세가 확장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을 추구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잘 알다시피, 교세 확장이나 경제적 자립은 수동적 사고와 태도를 가지고선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미래지향적이고 능동적인 사고와 태도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닌 마음가짐입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이야 말로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산 중 자산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을 이룬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가짐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은 원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있거나, 현실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결코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어떤 긍정적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2019년은 우리교회에 실로 중요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우리에게 불어 닥쳐올 것입니다. 하지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서 거센 밀물처럼 다가오는 위기와 기회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위협을 느껴 피하고자 한다면, 거센 파도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나, 당당히 맞아들이노라면, 거센 파도를 오히려 즐기게 될 것입니다.



2019. 1. 27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 예배는 교회창립 39주년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오전 11시 30분에 1부와 2부가 합동으로 예배드립니다. 오늘 예배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3. 화요성경공부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지난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다시 개학 했습니다. 새로운 분들의 적극적 동참을 기대합니다. 

4. 임시교인총회가 2월 3일(주일) 2부예배 후 곧바로 있습니다.

5. 세금보고(Tax Return)를 위한 지난 해 개인 헌금보고서가 각 가정으로 우송되었습니다. 혹시 받지 못한 분이나 보고서에 차질을 발견한 분은 교회 사무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6. 본 교회 원로 목사이신 김거정 목사님께서 21일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한나님의 크신 위로가 온 유가족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장례예배는 28일 (내일) 오전 11시 본 교회에서, 하관예배는 오후 3시 Glendale Forest Lawun Memorial Park에서 있습니다.

7. 현재 논의 중인 교단의 동성애 관련 기사와 설문조사가 연합감리교회 공식 웹사이트(www.koreanumc.org)에 실려 있으니 많은 참조바랍니다.

8.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9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9.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Wednesday, January 23, 201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1:3-14 (2003 320일 주일예배)
그리스 신화에 보노라면, 오디푸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테베의 암산 부근에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괴물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는 자들에게 그가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 날 오디푸스도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그 괴물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침에는 네발로, 낮에는 두발로, 밤에는 세발로 걷는 짐승이 무엇인가?”
오디푸스는그것은 사람이다고 답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후 네발로 기어 다니다가, 커선 두 발로 걸으며, 나이가 들면 지팡이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자 분한 괴물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습니다. 홧김에 자살한 그 괴물은 스핑크스였습니다. (오늘부턴 몇 주 동안 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훗날 무엇을 할까?” “살아 가는 동안 무엇을 할까?”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런데 가만히 살펴 보노라면, 많은 경우 이런 질문은 자기 중심적이자 자기 주관적인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는 결코 삶의 목적을 올바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장비의 기능을 완벽하게 사용하려면, 우선 사용 설명서부터 참고해야 합니다. 매뉴얼 안에는 그 장비의 속성, 활용도, 관리법 등 모든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장비 자체는 자기 자신의 속성, 잠재력 그리고 사용 방법을 모릅니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을 수행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쓰임 받아야 제목적대로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2:7-10).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신 그분의 창조물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선 우리 각자를 위한 매뉴얼을 갖고 계십니다. 그의 매뉴얼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지음 받았는지 알려줄뿐더러 우리의 잠재력까지 훤히 볼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잘 알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에.
그래서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삶의 목적을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를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믿습니다. 현명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 지음 받은 목적에 맞게 쓰임 받는 자입니다. 설령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목적을 정하여 그것을 성취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성공적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는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깨닫지 못했고, 또한 그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참으로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얻고자 힘써 노력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들도 그 해답을 찾고자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북동부 일리노이즈 대학(Northeastern Illinois University) 철학 교수인 휴 무어헤드 박사(Dr. Hugh Moorhead) 250명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들, 과학자들, 작가들, 그리고 석학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meaning of life?)” 그리고 사람들이 보내온 대답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유명한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발견한 인생의 의미입니다.
이 책에 보노라면,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깨달은 바를 적었지만, 어떤 이들은 그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노라고 솔직히 답했습니다. 그리고 무어헤드 박사에게 어떤 이들은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의 응답을 받은 후 인생의 목적을 찾게 되면, 그것을 자신들에게도 꼭 알려달라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 그것은 스스로 찾으려 고민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250명의 이 시대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내놓은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주어진 것계시(revelation)”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계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도우시면, 우리는 인생 의미와 목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위해 정하신 삶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으십시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 (1:11).
그래서 성경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95:7).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풍부한 사랑을 나누고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4-5).
이렇게 보건대, 우리는 슬퍼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자들이 아닙니다. 좌절하고 낙심하며 살아갈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안에서 마음껏 즐거워할 자들입니다.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나루고자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너무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너무너무 사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와 더불어 자신의 관계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을 지으셨을 때는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사람을 지으신 후엔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즉 나와 여러분들을 빚은 후 너무나 기뻐하셨고, 너무나 소중히 여기셨으며,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좀 더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기뻐하시고 소중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한결같습니다. 우리 삶의 환경이 잘 풀릴 때만 그가 우리와 함께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거할 때만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술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46:3-4). 우리의 새벽, , 저녁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그의 열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그가 이 땅에서만 우리를 사랑한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시작된 사랑의 관계가 영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그 사랑을 지속하고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eternity)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3:11b). NIV그가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심으셨느니라(He has set eternity in the hearts of men)”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매우 원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마음에 영원(영생)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비록 썩어진다 할지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죽어도 죽는 게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죽음이란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단계일 뿐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도록 우리는 지음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이 믿어지나요?
어느 만화책에 이런 재미난 우화가 있더라고요.
어느 애벌레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애벌레들이 모여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회의 결론은 바깥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고자 건강한 애벌레를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선출된 애벌레가 나무를 기어서 높이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위로 올라간 애벌레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벌레들은 다른 애벌레를 위로 올려 보냈습니다. 먼저 올라간 애벌레가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밖의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살펴보라는 명령과 함께. 하지만 둘째로 올려 보낸 애벌레도 위로 올라간 후 다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셋째, 넷째 애벌레를 올려 보냈으나 단 한 마리 애벌레도 다시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래 애벌레들은 위로 올라간 애벌레들에게 커다란 위험이 닥친 것으로 간주하고서, 다신 애벌레를 위로 올려 보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위로 올라갔던 애벌레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쳤던 것일까요? 사실은 그들에게 위험이 닥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로 올라가느라 고생하면서 껍질을 벗어내고 나비로 변했습니다. 그 나비들은 바깥 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보았던 것을 아래 애벌레들에게 알려주려고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어느 애벌레도 그토록 아름다운 나비들이 자신들의 미래인 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닥에 머물러 살아가던 애벌레들처럼, 우리 역시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진 하나님과 함께 누릴 삶이 어떤 것임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곳의 삶을 조금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이 세상의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 땅을 위해서만 우리를 창조하진 않으셨습니다. 이 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누릴 영원한 기쁨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 링컨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겨우 하루 살아가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결코 아니다. 인간은 영원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나침반과 시계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올바로 길을 가고 있는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계란을 얼마나 삶느냐에 따라 잘 익은 완숙이 되기도 하고, 설익은 반숙이 되기도 합니다. 삶 역시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습이 크게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양 생각하지 마십시오. 좁고 한시적인 인생관에 집착하기보단 이 땅에서 살아가며 다시 돌아갈 영원한 본향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영원한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릴 행복을 위해 이 땅에서의 삶을 투자하십시오. 그 나라를 위해, 그 나라의 상급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아낌없이 투자하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Friday, January 18, 2019

희망의 크기만큼 삶이 변한다




희망의 크기만큼 삶이 변한다
신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각자 한 마디씩 주고받는 회의가 잘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대화가 막히길 시작하더니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많은 사안에 대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포기할 것은 기꺼이 포기할 순 있었으나 단 하나의 사안은 결코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것을 사람들의 심장 속에 넣어두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希望). 신들도 쉽게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던 것. 물론 희망은 바라는 어떤 상황이 일어날 것이란 기대와 예측을 의미하고, 그것의 실현 시간은 명확하지 않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만약 희망이 없었다면, 인간 세상이 어떤 모습일까?”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은 이 정도로 발전하진 못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일찍이부터 깨어 있는 자들이 숱한 실패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현실로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적으로 시도했기에 인류 문명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류 문명이란 인류의 사상, 지식 그리고 과학 발전 등 모든 것을 총망라합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노라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희망을 현실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졌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진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계속된 실패 때문에 절망과 포기로 끝을 맺곤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파우스트란 책에서 괴테는 인간의 두 큰 적들두려움과 희망으로 꼽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괴테와는 달리 나는 희망을 부정적 요소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설령 희망을 가졌기에 쓰디쓴 실패의 대가를 맛본다 해도. 그리고 나는 희망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축복 중 축복으로 이해하고 소중히 여깁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변화를 시도하노라면, 언젠간 그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어려움은 희망에 의해 능히 극복됩니다. 정녕 그러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힘들다고 해서, 포기하면, 그 상황으로부터 탈출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힘든 곳에서조차 희망을 찬양했던 쇼탱크 탈출에서 나온 문구를 나 자신은 무척 좋아합니다. 두려움은 당신을 감옥에 가두어 두지만, 희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또한 희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우린 희망을 가슴에 품고서 살아감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능히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품은 희망의 크기만큼 삶의 질과 크기가 달라집니다. 2019년 한 해 동안 희망을 품고, 주와 함께 그 희망을 성취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9. 1. 20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속장/인도자 모임이 오늘 2부 예배 친교 후 교육관에서 있습니다.

3. 화요성경공부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금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다시 개학 합니다. 새로운 분들의 적극적 동참을 기대합니다. 

4. 교회창립 39주년 기념예배가 2019년 1월 27일(주일) 오전 11시 30분(2부예배 시간)에 있습니다. 1, 2부 합동으로 모여 예배합니다.

5. 임시교인총회가 2월 3일(주일) 2부예배 후 곧바로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동참을 바랍니다.

6. 세금보고(Tax Return)를 위한 지난 해 개인 헌금보고서가 각 가정으로 우송되었습니다. 혹시 받지 못한 분이나 보고서에 차질을 발견한 분은 교회 사무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7. 현재 논의 중인 교단의 동성애 관련 기사와 설문조사가 연합감리교회 공식 웹사이트(www.koreanumc.org)에 실려 있으니 많은 참조바랍니다.

8.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9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9.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January 15, 2019

창립 39주년 감사예배



창립 39주년 감사예배
2019 127일 오전 11 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드랜드힐스연합감리교회 (사랑나무교회) 창립 39주년 감사예배가 2019 127일에 있습니다. 지난 39년 동안 눈동자와 같이 우리교회를 지켜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올려드리는 축하예배에 온 성도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지난 39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결같이 신실하셨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사 분연히 다시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감사 드림이 지극히 마땅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런 희망의 약속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43:18-21)
금번 창립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현재 우리가 어느 곳에 서 있는지 점검해보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히 모색할 수 있길 바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를 이웃과 세계를 향해 지속적으로 강하게 풍겨내는 교회가 되려는 다짐을 새롭게 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는 신앙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를 삼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여러 가지 여건 상 분주하다 할지라도 금번 창립예배에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길 바라고, 특별히 이날 예배는 1부와 2부가 오전 11 30분에 함께 예배하오니 시간에 착오 없기 바랍니다.


이상호 목사 올림



Monday, January 14, 20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43:14-21 (2019 113)
새해가 되면 누구나 다 새해에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다시피 소망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소망 성취는 그것을 이루려는 당사자의 굳은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결여된 소망은 대부분 단순히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그 어떤 해보다 더욱 의미 있게 시작하고 싶다면서 새해 첫 아침에 가족을 데리고 동해 바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해를 바라보며 그가 담배 한 개피를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그것을 두 쪽으로 뚝 분질러버리고선 이런 다짐을 외쳤습니다. “이제부턴 금연이다.
그리고 나서 기분 좋게 가족들과 함께 동해 앞바다에서 하루를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통체증이 얼마나 심한지 차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성질이 나니까 그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더니 앞차에 다가가 운전석 창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앞 차에 있던 사람이 창문을 내리며 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 담배 한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담배를 부러뜨리며 외쳤던 결심인데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결심한다고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한다고 모든 게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소망을 이루려면 그것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결단이 작심삼일이 되고 말지요.
그러다 보니까 그럴만한 의지가 자신에겐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우린 아예 소망조차도 품지 않으려 합니다. “난 안돼”하면서 미리 포기해 버립니다. 물론 그것이 자기 분수를 알고서 쓸데없는 욕심을 갖지 않기 위함이라면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좀 더 힘쓰고 노력한다면 능히 이루어 낼 수 있고, 한 단계 더 나은 모습으로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서 쉽게 단념하고 맙니다.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요? 이 속담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론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설령 가다가 포기할지라도 적어도 가보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
처한 상황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포기하노라면 결코 소망을 품을 수 없거니와 어떤 소망도 이룰 수 없습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자기 자신과 환경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울부짖으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이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손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을 품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전진하고자 힘써 노력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노라면, 결국 이런 사람들이 소망을 이루고, 자신의 모습을 더 나은 삶으로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늘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좀더 나은 삶을 추구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 제국에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의 몸이 되어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온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낯선 나라까지 포로가 되어 끌려왔으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그리고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생각하노라니, 어리석은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후회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나간 일은 잊고 앞을 향해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란 약속을 주십니다.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기적 같은 일을 행하실 것이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작금 현실은 나라가 망했고, 그들의 몸은 포로 되어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도 절망치 말고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소망 가운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 지향적 자세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은 과거에 있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아무리 애쓴다 해도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의 시간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무한한 긍정적인 일을 오늘과 내일엔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지향적인 사람에게서는 별로 기대할 것이 없지만 미래 지향적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무한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기에 그는 남들처럼 공부할 수 없었고, 결국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께 묻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은 과거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자꾸만 끄집어내고, 과거를 분석하려고 드는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런 견해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한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 그가 소경이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어떠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것인지 관심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소경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는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중학생 때 운동장에서 놀다가 날아온 축구공에 눈을 다쳐서 실명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을 잃은 후 아들만 의지하며 살던 어머니께서 여러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끝내 볼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더니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누나를 의지하고 살았는데, 누나마저 몇 년 후 과로사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불행이 계속될 때 그도 죽고 싶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게 자신은 하루 아침에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어머니도 잃고, 누나마저 죽고 하는데, 정말이지 살아갈 의욕이 있었겠습니까?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날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수없이 뒤덮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절망 중에 있을 때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소경 된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소경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을 마쳤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와서 박사학위를 받고서 미국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행정부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 공직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는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 간증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간증을 듣고서 위로와 용기를 얻은 사람, 하나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과거지향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 처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절망적일지라도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갈 능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부족하고, 미련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소망이던지 능히 이루도록 도우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지향적인 시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미래에 반드시 밝은 소망이 있습니다.
새해 결단을 세운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결단을 빼앗아가려는 일들이 꼭 생깁니다. 예로 들어, 담배를 끊으려 하면, 심한 교통체증으로 금연 노력을 포기하고서 다시 담배를 입에 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우리 의지를 빼앗고 포기하게 만들려 합니다. 그런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결단을 새롭게 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인 몰트만이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절망은 가장 나쁜 죄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지요. "절망은 재앙을 부르는 가장 나쁜 죄다."
예수님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9:23)
얼 햄너 주니어(Earl Hamner, Jr.)가 쓴 둥지를 떠난 새(Spencer's Mountain)이란 책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나눈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왜 안 가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생각해보니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클레이보이가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네가 저 꼬마 아가씨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래요. 그래도 생각해보니까 안 가는 게 낫겠어요.
사실은 그렇지 않지, 이 녀석”
맞아요.
너는 약간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다. 아마 얼마간은 그것 때문일걸.
사실은 그래요. 얼마간은.
네가 정말 가고 싶지 않다는 것과, 가고 싶긴 한데 약간 두렵다는 건 문제가 달라, 내 말 알아듣겠니?
, 아버지”
네가 두려워하는 상대를 그대로 두면, 그건 언제나 너를 얕보게 돼. 결국 넌 지는 거야. 네가 진심으로 거기 가고 싶지 않다면, 안 가도 좋아. 그러나 두려워서 가지 않겠다면,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거야.
클레이보이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테이블로 걸어가 구두를 집어들었다. 아버지 쪽을 보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가겠어요.
그가 얼굴을 돌렸을 때,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도전하다가 또 다시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실패 앞에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실패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결국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도구로 쓰임 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자꾸 넘어지고, 자꾸 실패해도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결코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어나 도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절망적인 상황을 변화시키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능력이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부족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바라는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2019년 새해는 주님과 함께 주님의 일을 이루면서 기뻐하며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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