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5, 2018

이 사람이 누구인가?






이 사람이 누구인가?
21:1-11 (20183 25일 종려주일)
유월절 주간이 찾아 들자 그 소문난 유대축제에 참석하려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과 인근마을로 몰려들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사역하실 때 주로 다니셨던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한편으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계신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성내에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수많은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서 그를 맞으러 성밖으로 나갔습니다.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이 보이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
시편 118편에 유월절 축제와 관련된 시가 있는데, 그 축제에 참석한 이들이 익히 그 싯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 118:25, 26).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는 히브리 말로 호쉬아나(Hoshiana)”인데, 우리는 이것을 호산나(Hosanna)”로 발음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길 원합니다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되었는데,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젠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란 약속 성취에 대한 염원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그토록 열광적으로 맞이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신비한 기적과 치유능력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풀어 설명하실 때 하나님의 지혜가 그 가르침에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할 수 있는 큰 권위가 예수께 있음을 보고서 지극히 놀랐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놀라운 행적을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열렬히 그를 환영했습니다. 커다란 희망과 기대를 안고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외치며 찬송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결국 열렬한 환영 속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성내에 들어섰을 때 그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마태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내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10).
이곳저곳에서 시끄럽게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누구뇨?”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인가?”란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예루살렘 성을 그런 소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질문은 동일한 주간 예수께서 빌라도와 군중 앞에 섰을 때와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죽어갈 때에도 제기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비난과 찬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나사렛 예수란 자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사람이 누구인가?”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란 질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2천년 전에 살다 떠나간 이에 관한 질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소용이 있느냐고요? 
그런데 진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인격과 신앙체계 그리고 삶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까지 좌우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을 결코 회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예수가 누구입니까? 그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한 역사적 인물입니까?
유대인들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시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좌에 오르고 대적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 이스라엘을 위대한 왕국으로 다시 회복시킬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열광적으로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고서 환호한 것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은 곧 메시아를 의미했습니다.
물론 그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께서 다윗의 혈통인 게 분명합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란 사실도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간과한 실로 중요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용맹스런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그들은 직시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성내로 들어오셨을 때, 그곳이 그토록 요란스럽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숙연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벳바게란 동네에 다다랐을 무렵 그의 두 제자를 보내어 맞은편 마을 입구에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오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3). 또한 다음과 같은 구약의 예언까지 인용하시며 그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하라”(4). 그래서 명령 받은 대로 두 제자가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왔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어 예수께서 그 위에 오르시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보건대,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 예수께선 자기 자신이 어떠한 메시아인지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예수께서 이미 명확히 제시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코자 예루살렘에 오르셨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이해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낮에 굳이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했기에 해방자적 존재로만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만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요구했을 뿐입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 떨며 장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새끼 호랑이가 어미 호랑이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호랑이 맞아? 나는 달리기도 못하고, 아직까지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았으며, 사냥도 못하는데. . . 내가 참으로 호랑이 맞아?"
어미 호랑이가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았으니까 너는 틀림없는 내 새끼 호랑이란다."
새끼 호랑이가 엄마 호랑이를 귀찮게 자꾸 되묻습니다. "엄마, 나 정말 호랑이 맞아! 강아지만도 못한데, 내가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진짜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개새끼야,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그래서 졸지에 아기 호랑이는 개새끼가 되어버렸습니다.
흔히들 많은 사람이 남의 기대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남의 기대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높은 기대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자기 자신의 소신과 소명까지도 포기하고 맙니다. 그래서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소중한 사명까지 포기하고 맙니다.
남의 기대치에 끌려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예수께는 결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완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옛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란 누구입니까?
예로 들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듯,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는 겸손히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는 겸손한 왕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고난 받는 종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위해 대신 죽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히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편견과 기대감에 사로잡힌 채 그들은 예수께서 굳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르는 이유를 깊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열광은 금새 식었고, 불과 며칠 만에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십니까? 이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반드시 이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이 소란스럽습니다. 우리 신앙이 혼란스럽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민정시찰을 하던 중 어느 시골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엔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여왕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으나 그럴듯한 음식을 내놓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평소에 아끼던 소중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여왕이 그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이 집에 많은 사람이 방문 했을 텐데, 그 중 가장 귀한 손님이 누구였습니까?
여왕은 그 농부가 예수님이라고 대답할 줄로 기대했는데,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 우리의 가장 귀한 손님이십니다.
실망하는 눈치로 여왕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왕일지라도 여전히 사람인데, 가장 존귀하신 분은 예수님이 아닌가요?
그때 그 농부가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폐하, 예수님은 나의 손님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 말을 듣고서 여왕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며 회개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손님으로 모셨구나.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동안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누구입니까?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분과 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친히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자신의 거룩한 피를 흘려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가 죽어가면서 떨리는 심정으로 예수께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23:42).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이런 화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23:43).
예수란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죽을 때, 그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목격한 백부장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15:39)
이 사람이 누구인가?” 성도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여러분의 왕으로, 여러분의 메시아로 고백하며 찬양하십시오. 믿음의 큰 함성으로 그를 환영하십시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무척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도 우리와 더불어 기쁨의 축제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와 더불어 그들 역시도 호산나를 크게 외치며 주님을 맞이하게 해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Friday, March 23, 2018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오늘은 종려주일로써 주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교회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련된 성경기록은 마 21:1-11, 11:1-11, 19:28-38, 그리고 요 12:12-19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성 밖으로 종려가지와 기타 여러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합니다.
종려주일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동로마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교회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는 의미로 종려가지를 들고 긴 행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서로마교회는 종려주일 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축하보단 그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애도하는데 더욱 큰 의미를 더욱 부여했습니다.
중세시대엔 종려주일이 다가오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성도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면서 가까이에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일을 한때는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관습은 여러 교회에서 지켜지고 있습니다.
2018년 올해 종려주일은 3 25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고난주간/수난주간(Passion Week)”으로 지킵니다. 이름에서 읽어볼 수 있듯이, 고난주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특별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Maundy Thursday),” 또한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성 금요일(Holy Friday)”이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사순절 영적 순례여정 가운데 고난주간에는 각별히 오락을 금하고 금식하며 우리를 위해 주께서 친히 겪으셨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특별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온 성도가 더불어 주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더욱 깊게 되새길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합니다.
주 예수께서 커다란 무리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닷새 만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아우성치는 어리석은 무리의 배신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목소리 높여 외치고 외치던 무리가 불과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댈 것을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나 배신 따위엔 추호의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그의 초점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무리의 말과 행동에 상관없이 예수께서는 오직 자기 자신의 길만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과 나를 위해.



2018. 3. 25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은 고난주일/종려주일입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예배가 3월 26일(월)부터 31일(토)까지 오전 6시에 있습니다.

3. 성금요예배가 3월 30일(금) 오후 8시에 성전에서 있습니다. 3월 28일은 “침묵의 날”로써 수요예배는 없습니다.

4. 부활절합동예배를 4월 1일 오전 11시에 영어회중과 함께 드립니다. (1부 예배는 없습니다).

① 세례/입교예식이 있습니다. 세례나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담임 목사님께 연락바랍니다.

② 제단장식을 위해 백합화분을 기증받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예배에   오실 때 십자가를 장식할 꽃을 가져오기 바랍니다.

5. 재단이사회와 북부지방회 유니언 모임이 3월 27일 (금주 화) 오후 7시에 교회에서 있습니다. 이 모임을 위한 준비로써 재단이사회 모임이 오늘 2부 예배 친교 후 AV Room에서 있습니다.

재단이사회 임원: 2018-고동출, 권수혁, 박종승; 2019-고정길, 김진, 김학덕; 2020- 김문철, 남성호, 최경자 (임원회장, 평신도대표, 재정부 필히 참석 요망)

6. 교육관 보수공사를 위해 힘써주신 북부 지방회에 감사드리고, 교육관 카펫공사를 위한 특별헌금을 모급합니다. 

7. 한인연합감리교회 총회가 “복음으로 희망을 여는 한인연합감리교회”란 주제로 뉴저지 아콜라 연합감리교회에서 4월 9-12일 동안 열립니다.

8.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 고바비 집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March 20, 2018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14:25-35 (2018 3 18일 주일예배)
삶이 외롭고 불행한 남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게 아름다운 여인을 허락해주십시오. 매우 외로워 삶의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굳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려 하는가?”
그때 남성이 화가 잔뜩 난 투로 대답합니다. “아니, 십자가라니요? 그렇다면 외로움 가운데 제가 자살이라도 하길 원하십니까? 더불어 삶을 살아갈 아리따운 여성이 제겐 너무나 필요합니다.”
결국 기도한 대로 그는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홀로 있었을 때보다 결혼 후가 더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삶이 더욱 외로울 수 있다는 슬픈 진실을.
그래서 그 남성이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간청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다시 거두어 주옵소서.”
우리는 어느덧 사순절 다섯째 주간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깊게 생각하고 감사할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찾아 그 십자가를 지겠노라 결단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엔 이 사람을 보라!”란 제목으로 말씀드리면서 우리를 위해 주께서 지신 십자가를 말씀 드렸다면, 오늘은 주를 위해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를 믿고 따르는 목적이 주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과 구원을 누리되, 주님의 제자로서 감당할 의무와 본분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면,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을 주께서 친히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6, 27)
곧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빈 손으로 주를 따르겠다는 것은 주님과 별로 상관없는 자로 남겠다는 의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 소수의 사람들, 곧 예수님의 정예부대에게만 요구된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오늘 본문의 첫째 구절, 25절을 유의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 . ”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제자도는 예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명하신 게 아니라 자신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곧 제자도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달리 말해, 제자도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형상의 목걸이나 귀고리를 차고 다닙니다 (십자가 목걸이, 귀고리 유형 PPT). 그런데 왜 굳이 십자가 형상이어야 할까요? 그럴듯한 다른 모형도 많은데. . .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 형상을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은 단순히 미를 추구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란 의미에서 십자가 목거리나 귀고리를 몸에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다면 십자가 금은 목거리나 귀고리를 몸에 차고 다니면, 우리가 제자도, 즉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주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야 했고, 자신이 지고 간 그 나무에 그의 두 손과 두 발이 못박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6시간을 큰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왜요? 그가 우리 죄를 친히 자기 몸에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참으로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친히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단순히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모형이 아닙니다. 금은 액세서리나 명예나 부귀가 아닌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입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에서 지적한 내용입니다.
예수께는 그의 왕국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의 십자가를 같이 짊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했지만, 불과 소수만이 끝까지 남아서 그의 쓴 잔을 마셨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줄곧 이야기하곤 합니다.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주를 위해 정작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 합니다. 곧 예수의 고난과 저주의 십자가는 고마워하건만, 정작 자기 부인과 희생은 마다합니다. 지고 싶어하는 것이 고난과 저주의 십자가가 아닌 아름답고 영광스런 형상일 뿐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 안에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습니다.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른 후 그리스도인들의 짓이라고 덮어씌우고 기독교를 거세게 핍박했습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목숨을 보존키 위해 로마를 떠났다가 곧 회개하고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십자가 형틀에 묶여 순교 당했습니다.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쓰여진 시가 있는데 베드로의 시입니다. 물론 베드로 본인이 쓴 시는 아닐 것입니다.
!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리고 떠났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내 십자가여! 주께서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나 또한 죽게 되니 감격하여 그대를 맞노라. 나 잠시 동안 이것을 버리고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던가? 나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던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대의 품에 달리겠노라.
우리가 들어서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끝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주를 위한 자기 부인과 희생의 십자가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는 다름 아닌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주를 잔인하게 핍박하던 자가 누구보다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소개합니다.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1:23-24)
사도 바울의 십자가는 주 예수의 복된 소식을 땅끝까지 전하여 주님의 교회를 힘써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 9:15). 곧 주의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는 전도와 선교가 그의 사명이자 그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짊어지고 주를 따라야 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달리 말해, 주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은 무엇일까요? 주를 위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서 주를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명의식이 없인 결코 불가능합니다.
사실 예수께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14:36).
산헤드린, 곧 유대공회와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시고, 모욕 당하실 때, 예수께서는 말없이 묵묵히 하늘만 우러러 바라보실 뿐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위하여 그가 짊어지는 십자가, 그 거룩한 소명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 총독 빌라도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는 침묵 밖에 달리 선택할 게 없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힘든 것입니다. 그토록 고통스럽습니다. 그토록 외롭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힘들 때 우리가 묵묵히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기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다가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거들랑 우리를 위해 주 예수께서 친히 짊어지신 십자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몸이 우리 죄악 때문에 찢겼고, 그의 거룩한 피가 우리 때문에 땅에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생명이 우리의 영생을 위해 기꺼이 포기되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하건대, 우리도 정녕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서 주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8:34).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짊어지고 주를 따라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자기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때론 너무나 수치스럽습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를 따른다면,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 25:23).
마지막으로, 일본식민지 때 윤동주의 십자가 (十字架)를 읽어드리며 오늘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십자가 The Cross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十字架)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What’s the Cross for Me?



What’s the Cross for Me?
LK 14:25-35 (March 18, 2018)
A lonely and unhappy man prayed, "Dear God, please allow me a beautiful woman, for I’m very lonely. As you know I’m in need of a companion."
At that time God smiled at him and asked, "Why are trying to bear a cross yourself?"
The man answered in frustration, "What do you mean that a woman is a cross to me? Then do you want me to commit suicide in loneliness? As I told you, I am desperately in need of a woman I fall in love and have a life together."
Eventually, as he prayed, he met a pretty woman and got married. But not too long after, he came to realize that his life could become unhappier after marriage than when he was single. He realized that his life after marriage could become lonelier than ever before.
So the man made another petition to God, “Dear God, please take away from me the cross you granted me.”
We are going into the fifth week of Lent. Lent is a season in which we think more about the cross that the Lord Jesus took for us and give thanks to him for his suffering and death for us. Moreover, it is a season in which we commit ourselves to bear our own cross for him.
Last Sunday’s message was about the cross Jesus bore for us, but today’s is about the cross that we have to bear for him.
There are so many believers of Jesus in this world, but not many are true followers of his. It is for the reason that all they want is only the grace and blessing from the Lord. They love to enjoy all the benefits from the Lord, but they deny the responsibilities and obligations for them to take over as his disciples.
But if anyone wants to become his disciple, there’s a prerequisite that he should take his own cross. The Lord himself mentions it as follows:
If anyone comes to me and does not hate his father and mother, his wife and children, his brothers and sisters--yes, even his own life--he cannot be my disciple. And anyone who does not carry his cross and follow me cannot be my disciple. (LK 14:26, 27)
If we follow him without taking our cross, it means we intend to follow him with empty hands and in return we don’t mean to him much.
Then the way of discipleship, in other words, the command to deny oneself and take his cross follow the Lord, is asked only to a few chosen ones? What do you think?
To answer this question, we better carefully read the 25th verse: “Large crowds were traveling with Jesus, and turning to them he said.”
That’s right. The way of discipleship is requested not only to a few chosen ones but to “large crowds” who followed the Lord. It means the way of discipleship is for everyone who decides to believe and follow the Lord. In other words, the way of discipleship is for us who are sitting in this sanctuary as well.
If each of us takes our own cross and follow Jesus, what is the cross committed to each of us? This is a very important question for all disciples of Jesus.
Many people wear cross-shaped necklaces or earrings (PPT). But why should they be in the form of a cross? There must be many other plausible shapes beside the cross.
It would be fine for the people of the world to wear a cross as a beauty item. But we Christians should have different reasons and purposes to have it. The cross on our body must mean that “We are disciples of Jesus Christ.”
Then can we consider ourselves to be the followers of Jesus if wearing a cross necklace or an earring on the body? Of course, not. It is not that simple for us to be his disciples. We must come up with a correct understanding of what the Lord's cross is first.
The Lord Jesus who is God’s Son was blameless and righteous, but carried a heavy tree on his shoulders to Golgotha Hill and was nailed to it. And for six hours he suffered in enormous pain and died. Why? It is for the reason that his cross was for us and because of our sins.
That’s right. For us, the Lord Jesus himself took a heavy cross which we couldn’t handle by our own power or might. And then he says to us, “Anyone who does not carry his cross and follow me cannot be my disciple.”
Yes. The cross we should take and follow Jesus is not a simple cross decoration made of gold or silver or wood or stone. It is not an accessory for beauty. It is all about what we deny ourselves and give up for the cause of the Lord.
Thomas a Kempis (1380-1471), a German mystic thinker, wrote this in The Imitation of Christ:
Jesus has always many who love His heavenly kingdom, but few who bear His cross. He finds many to share His table, but few to take part in His fasting. All desire to be happy with Him; few wish to suffer anything for Him.
This’s right. Many people love to talk about Jesus' cross. They love to kneel under his cross and pray. But they do not want to bear their cross for the Lord. They are thankful for the crucifixion and the curse that Jesus bore on their behalf, but they refuse self-denial and sacrifices for the Lord. What they want to bear is not of suffering and curse for the Lord, but only of beauty and glory for themselves.
Nero, Roman Emperor, executed so many Christians in Rome and in other parts in his empire. After burning the streets of Rome, he blamed the Christians in Rome for the fires and persecuted Christianity severer than ever before. In such a dangerous situation, Peter left Rome to preserve his life, but then he repented and came back to Rome. And not too long after his return, he was arrested and bound in a cross, and martyred. There is “Peter's poem,” written in commemoration of his martyrdom. Of course, it was not written by Peter himself but by someone else.
Oh! My cross! My cross that I had left but still longed to see! I am extremely grateful to have the for I am hung and dying on the same cross that the Lord had died for me. When leaving thee behind, how much have I missed thee? How much have I loved thee? Today thy led me to back the Lord, so I’ll throw myself into thy arms now.
As we’ve heard, Peter ended up his life, hung upside down on a cross.
That's right. As the disciples of the Lord, the cross that we ought to bear must be self-denial and sacrifice for the Lord.
And what we shall remember is this: The cross is our mission or vocation entrusted by the Lord.
After the Apostle Paul had encountered the Lord on the way to Damascus, he became a hard working evangelist of the Gospel of the Lord. And later he described his cross as follows:
This is the gospel that you heard and that has been proclaimed to every creature under heaven, and of which I, Paul, have become a servant. Now I rejoice in what was suffered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 1:23-24)
The cross for the Apostle Paul was to deliver the Good News of the Lord Jesus to the ends of the earth and to work hard to strengthen the Lord's Church. So he said as follows: “But I have not used any of these rights. And I am not writing this in the hope that you will do such things for me. I would rather die than have anyone deprive me of this boast” (1 Cor 9:15). Therefore, his cross was evangelism and mission to scatter the Gospel of the Lord to every corners of the world.
Then what is the cross for us to carry and follow the Lord? In other words, what is the work entrusted to us by the Lord? What do we have to deny and make sacrifice for the Lord?
Of course, it is never easy for us to bear our cross and follow the Lord. It is never possible without a strong sense of vocation and commitment to the Lord.
In fact, it was very hard and painful for Jesus himself to take his cross. So when praying in the Garden of Gethsemane, did he not ask God his Father? “Abba, Father,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K 14:36).
When interrogated and insulted by the Sanhedrin, the Jewish Council, and by Pilate, the Roman governor, what Jesus did was just to stare silently toward the heaven. Could the leaders of the people of Israel have ever known the meaning of his Cross and his divine call for all mankind? Could Pilate, the Roman governor, ever known that as well? So there was nothing but taking deep silence for Jesus to do during his trials in the Sanhedrin and in the palace of the Roman governor.
It is very difficult for us to take our own cross and follow the Lord. It is so painful and lonely. So what we can do at that time is just to look at the heaven in silence.
Dear brothers and sisters, please let us remember: Whenever it seems too heavy for us to take our own cross and follow the Lord, think about the cross that the Lord Jesus himself carried for us. The noble body of God’s Son was torn for our iniquities, and his holy blood was poured out on the ground on behalf of our redemption. And his divine life was willingly given up for our eternity. If thinking about his sacrifice and death on the cross, we will surely be able to follow the Lord while still bearing our cross entrusted by the Lord.
The Lord speaks to u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MK 8:34). Dear brothers and sisters, what is the cross that you are carrying and following the Lord now?
Let us remember. The cross we bear is heavy. Sometimes and most times it looks so shameful to us. But if we take our cross and follow the Lord to the end, we will become his true disciples.
And he will tell us at the end,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with a few things; I will put you in charge of many things. Come and share your master’s happiness!” (MT 25:23)



Friday, March 16, 2018

축복이 축복이 되게




축복이 축복이 되게
교육관 지붕공사와 교실 보수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샜던 지붕과 그 주변을 뜯어보았더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피해가 컸기에 북부 지방회는 예상을 초월한 보수비를 지불해야 했을 뿐더러 복구기간을 상당히 소요해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교육관 천정 이곳저곳 손질까지도 마쳤고, 카펫공사만 남겨두었습니다.
교육관이 마치 새 건물처럼 아름답게 단장되어갑니다. 하지만 잘 단장되었음에도 아직까진 사용할 수 없음은 보수공사 중 오랜 빗물로 썩은 카펫을 벗겨냈기에 새 카펫이 필요합니다. 또한 보수공사 때 손이 닿지 않은 다른 곳의 카펫도 상태가 좋진 않습니다. 이곳저곳이 찢겨 있고, 제거할 수 없을 만큼 때가 잔뜩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했던 바닥에 새로운 카펫을 깔면서 교육관 나머지 공간도 전체적으로 새 카펫으로 입히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교육관에 새로운 카펫을 깔려면, 재정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요구되기에 북부 지방회가 큰 고민 중에 있습니다. 지붕공사와 교실 보수공사에 예상을 초월한 비용을 이미 지불한 상황에서 또 다시 교육관 전체를 새 카펫으로 깔려는 것을 빨리 결정짓지 못한 채 있습니다. 지방회의 고민이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임시임원회에서 교육관 카펫공사를 위한 특별헌금 모금을 결의했습니다. 카펫공사비 대부분은 지방회가 담당하겠지만, 우리도 손을 놓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교회를 위해 온갖 수고를 아까지 않는 지방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재정적으로 힘을 합치려 한다면, 지방회가 더욱 힘과 용기를 얻고서 공사를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제 우리는 교회 재산권을 북부지방회로부터 가져오는 절차로 들어가려 합니다. 우리교회 재단이사회와 북부 지방회 유니언(Union)이 서로 만나 재산권 양도에 필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밀고 당기는 긴장감 속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상당한 인내력과 이해심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할 것은 불신과 일방적 자기주장입니다. 얼마만큼 상대방을 이해하고서 상생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논의 과정이 빨리 끝날 수도 있고 계획보다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쯤에서 우린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왜 교회 재산권을 소유하려는가?” “교회 건물과 부지를 잘 유지 관리코자 우리 스스로가 기꺼이 땀 흘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교회를 소유하고서 주님과 지역사회를 위해 이 교회를 어떻게 사용하려 하는가?” 교회 재산권 환수 이전에 이런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 재산권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닌 또 다른 큰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축복이 축복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2018. 3. 18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다음주일은 고난주일/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와 말씀 묵상에 힘쓰고, 신앙생활의 변화 추구에 힘쓰기 바랍니다.

3. 고난주간 특별새벽예배가 3월 26일(월)부터 31일(토)까지 있습니다.

4. 성금요예배가 3월 30일(금) 오후 8시에 성전에서 있습니다. 3월 28일은 “침묵의 날”로써 수요예배는 없습니다.

5. 부활절합동예배를 4월 1일 오전 11시에 영어회중과 함께 드립니다. (1부 예배는 없습니다).

① 세례/입교예식이 있습니다. 세례나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담임 목사님께 연락바랍니다.

② 제단장식을 위해 백합화분을 기증받습니다. 그리고 부활절 예배에   오실 때 십자가를 장식할 꽃을 가져오기 바랍니다.

6. 교육관 보수공사를 위해 힘써주신 북부 지방회에 감사드리고, 교육관 카펫공사를 위한 특별헌금을 모급하고자 합니다. 

7. 재단이사회 모임이 3월 25일 2부 예배 친교 후 AV Room에서 있습니다.(재단 이사회 임원: 2018-고동출, 권수혁, 박종승; 2019-고정길, 김진, 김학덕; 2020- 김문철, 남성호, 최경자)

8. 한인연합감리교회 총회가 “복음으로 희망을 여는 한인연합감리교회”란 주제로 뉴저지 아콜라 연합감리교회에서 4월 9-12일 동안 열립니다.

9. 춘계대청소(Work Party)에 동참해 수고하신 분들과 맛있는 식사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0.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 고바비 집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March 13, 2018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19:1-16 (2018 3 11일 주일예배)
앞서 미리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오르신 후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사로잡히셨습니다그리고 산헤드린 곧 유대 공회에서 심문 받으시고심한 조롱을 받으셨으며결국 유대법에 의해 신성 모독 죄로 사형선고 받으셨습니다그 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야바의 집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로 끌어갔는데때는 이미 새벽이었습니다.
한편으로몸을 더럽히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유대인들은 총독의 관저곧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빌라도가 직접 밖으로 나와 상황 파악을 해야 했습니다. “당신들은 무슨 죄목으로 이 사람을 고소하려는 거요?”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실로 중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총독께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화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직접 그를 붙잡아다가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도록 하시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유대인들과 말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던 빌라도가 관저로 다시 들어갔고예수님을 불러 다 이런 저런 심문을 했습니다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빌라도가 다시 관저 밖으로 나와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그를 풀어주도록 하겠소.” ( 18:39) 빌라도의 평결을 듣고서 유대인들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대신 풀어주시오!” 한편으로바라바는 살인강도였습니다.
무리의 성난 소리에 놀란 빌라도가 서둘러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수하들에게 예수님을 채찍질하도록 했습니다하지만 심한 매질을 당하면서도 예수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당연합니다죄가 없는데매질 당한다고 해서 죄를 실토할 리가 없습니다.
사실 메시아의 고난에 관하여 먼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 53:7, 8)
로마 총독 관저에서 예수께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뿐만 아니라 군인들은 마음 놓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그들은 가시나무로 왕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줏빛 옷을 입혔습니다그런 다음 예수께 와서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말하며 여러 차례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찌들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의 고개는 반듯이 들려 있었습니다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 속에서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사 50:6, 7)
빌라도는 몰랐습니다예수께서 누구이신지또한 그가 왜 그런 모진 채찍질과 조롱과 멸시를 굳건히 견뎌냈는지를그는 정녕 몰랐습니다.
한편으로그런 상황에서도 예수께서 그토록 당당한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나와 함께 설지어다나의 대적이 누구냐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보라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보라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사 50:8, 9)
그렇습니다예수님은 죄가 있어 사로잡혀 벌을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그는 진정 의로웠습니다예수님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한편으로예수님을 심히 매질한 빌라도가 또다시 관저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그대들에게 데리고 나오겠소여전히 나는 그를 고소할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소”( 19:4). 그리고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자줏빛 옷을 입고서 끌려 나오자 빌라도가 앞에 있는 무리에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19:5)
그때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다시 성난 목소리로 아우성쳤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소”( 19:6).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의 외침입니다예수께서 밤새 심문 당하시고심히 채찍질 당해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빌라도는 무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글쎄 모르겠습니다빌라도가 자신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와 위력을 알고 있었는지를.
이 사람을 보라!” 그런데 아셨습니까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외침이었음을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침 중 하나입니다빌라도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몰려 있던 무리그리고 온 세상이 그를 바라보아야 했습니다그 이유는 그를 바라보는 자만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마찬가지로사탄의 유혹에 빠진 자곧 죄의 독배를 마신 자는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자를 바라보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곧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빌라도는 실로 엄청난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헬라어: “Behold (ἴδε, id'-eh)” the (ὁ, ho) man (ἄνθρωπος, anth'-ro-pos)!”; 라틴어: “Ecce Homo (에케 호모).”
에케 호모 Ecce Homo” (엘리아스 가르시아 마르티네스의 그림)
이 사람을 보라!”라는 빌라도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려옵니다우리 모두가 빌라도가 가리켰던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이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곧 빌라도가 죄 없다고 선언했던 바로 이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죄가 없으나 모진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심한 채찍질 당한 후 골고다 십자가 위에 못 박혀 고난 가운데 죽은 바로 이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그 이유는 그가 당한 조롱과 모욕과 아픔과 죽음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53:5, 6)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 이런 저런 수고를 했으나 끝내 실패했습니다그래서 대야에 손을 씻고서 무고한 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키며 그들에게 예수님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그래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신 예수께서 그곳에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하지만 큰 고통 중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
그런데 사실은 그 기도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앉아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여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곧 그가 죄를 사하겠다는 선언입니다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선언입니다곧 여러분과 나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언입니다.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여러분우리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우리가정이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우리교회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이 나라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살아야 합니다그렇다면 어떻게그것은 에케 호모”, 즉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곧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물론 빌라도가 지목했던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십자가에 달린 그가 갖고 있는 권세와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또한 알고 있다면믿음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그를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6시간의 십자가 고통 후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신 후 숨을 거두셨습니다마가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7, 38)
그렇습니다예수께서 숨을 거두셨을 때성소의 휘장이 갈라졌습니다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장벽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허물어졌습니다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걸어갈 길이 열렸습니다.
이 영적 진리를 히브리 기자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죄는 없으시니라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5, 16)
독일 작센 지방의 백작이자 법률 고문관 니콜라스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젊은 시절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ti)가 그렸던 “이 사람을 보라!”란 성화를 보고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가시관을 쓰고 피 흘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것인데그 믿테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가시관을 썼건만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그 순간 진젠도르프는 그곳에서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실은 주님을 위해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오직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무엇이든 다 행하겠습니다.”
그 후 그는 모든 관직과 명예를 내려놓고 오직 열정과 청빈과 헌신으로 독일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선교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케 호모!”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인생을 정녕 달라지게 합니다
지금은 여전히 사순절 기간입니다성도 여러분이 기간에 에케 호모!”에 응답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여러분은 이 사람을 보고 계십니까그렇다면 그가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그리고 이제부터 그를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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