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5, 2018

운전석에 누가 앉습니까?




운전석에 누가 앉습니까?
8:27-38 (2018 225. 사순절 둘째 주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마을로 수련회를 가셨다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 8:27-30).
길을 가시면서 예수께선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곳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죽은 후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도 알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한쪽으로 데려다 야단쳤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야단을 쳤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ἐπιτιμ άω”(ep-ee-tee-mah'-o): (straitly) charge, rebuke. 꾸짖다, 야단치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러보신 후 다시 베드로를 정면으로 쏘아보시며 심히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도 꾸짖다, 야단치다는 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큰 불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 잔뜩 난 베드로가 예수께 대들었고, 그런 무례한 베드로를 예수께서 심히 나무라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베드로의 화를 그토록 돋웠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사로잡혀 죽음 당하는 것을 베드로가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원한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즉시 백성의 큰 환호와 응원을 입고서 예수께서 유대민족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곧 고난 받고 죽임 받는 힘없는 메시아가 아닌 강한 힘과 능력의 소유자 메시아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혀 고난 받고서 죽임 당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의  마음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런 경우를 뚜껑이 열린다고 표현하나요? 그래서 예수님의 한쪽 팔을 잡고 옆쪽으로 끌어다가 그를 심히 나무랬습니다. “다신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도 말라고 엄히 경고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지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33b).
예수께서 베드로를 분명히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사단이란 의미는 아니었죠. 베드로의 마음속에 불순한 생각을 집어넣은 악한 영, 곧 사단을 가리킴이었습니다. 곧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불순한 생각을 불어넣은) 사단아, 내 뒤로 썩 물러나라!”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c).
그날처럼 베드로가 혼이 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토록 크게 혼이 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사단이라 부르며 베드로를 야단친 예수님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내 자신을 뒤돌아봅니다. “혹시 예수께서 나를 사단이라 부르진 않으실까? 혹시 베드로처럼 나 역시 하나님의 일보다 나의 일을 앞세우진 않나? 하나님의 생각보다 사람의 생각을 먼저 고려하지 않나?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나 역시도 심한 꾸중 듣기에 합당치 않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기에 합당합니까? 아니면 심히 야단 맞기에 합당합니까?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갈등을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사실은 운전석에 누가 앉느냐? (Who is in the driver’s seat?)”에 대한 문제입니다. 곧 주도권 갈등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여정 가운데 누가 운전대를 잡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생활 가운데 누가 운전석에 앉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주님이십니까?
성도 여러분, 교회생활 가운데 누가 운전석에 앉아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주님이십니까?
만약 우리가 계속적으로 운전대를 쥐려 고집 부린다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동일한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썩 물러나라!” 이것은 사단아, 내 자리에서 물러서라! (Satan, get out of my seat!)”는 명령입니다.
예수께서는 운전석에 앉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그것이 예수께 속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주도권을 예수께 양보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혹시 아십니까? 운전석을 예수께 양보하지 않는다면,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 끊임없이 예수님께 맞서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야단 맞게 되겠죠? 그러면 우리의 삶이 무척 피곤하고, 재미가 없겠죠?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동행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과 길을 동행하기보단 그의 길을 막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박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박해할 수 있느냐고요? 그런 일을 결코 있지 않다고요?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요?
우리는 다소의 사울이란 인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훗날 그는 바울이라 불린 사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 전엔 유대교에 큰 열심을 가졌는데, 그 열심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9장을 보노라면, 예루살렘과 인근지역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던 사울은 멀리 이방 땅 다메섹까지 원정을 나섰습니다. 그곳에 있는 예수 믿는 자들을 남녀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 함이었습니다(9:2).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무렵 홀연히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내려와 그를 둘러 비추었고, 즉시 그는 말에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대답합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주의 음성이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왜요? 유대교에 대한 그의 충성과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1:13-14).
사울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최고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실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핍박할 뿐이었습니다.
너무 무섭지 않나요? 혹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최고라고 생각합니까? 그 열심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합니까?
그런데 혹시 그것이 착각이라면? 우리의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을 핍박할 뿐이라면?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면?
우리가 완고히 자기 뜻만 고집하며 자기 권리만 주장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열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려 한다면, 그를 위한다는 수고와 열심이 오히려 그를 해치는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혹시 겸손과 순종의 영이 아닌 자기 만족감에서 열심을 내노라니, 그것이 오히려 주님께 또한 그의 백성에게 해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꾸짖고자 하실 것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8:33).
하지만 만약 예수님을 위해 우리 자신의 뜻과 생각을 기꺼이 포기한다면, 예수께서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아니 하시겠죠?
우리 집에서 세상 편한 녀석이 둘째 아들입니다. 온 가족이 차에 탔다 하면, 그는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듭니다. 굳이 운전하려 하지도 않고, 운전자에게 이렇다 저렇다 간섭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 차 안은 포근한 침대입니다. 단잠 자고 일어날 때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으니 얼마나 좋은 팔자입니까?
그래요. 운전석을 포기하면, 만사가 편합니다. 만약 우리가 삶의 운전석을 주님께 양보하면, 우리 삶이 너무나 편해집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께서 메시지(The Message)란 성경에서 35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나를 따라올 의향이 있거들랑, 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운전석에 앉을 자는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괜한 갈등 가운데 힘들어하지 말라.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내 뒤를 따라 오너라. 그리하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겠다.”
사순절 둘째 주간입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혹시 그릇된 생각과 행동이 없진 않는지 살펴보며 수정해야 할 부분은 과감히 뜯어고치는 영적 훈련의 계절입니다.
물론 영적재활은 참으로 힘든 여정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뜻과 생각을 부인하는 훈련입니다. 재활은 처해 있는 환경에서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듣는 훈련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복된 소식은 재활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우리가 홀로 그 길을 걷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재활과정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 길을 행하십니다. 풍랑 속에서, 힘들고 어두운 밤 가운데서, 그가 길을 친히 인도하십니다. 밤에는 불기둥처럼, 낮에는 구름 기둥처럼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그릇 향하는 길을 멈추십시다. 삶의 초점을 다시 맞추십시다. 방향을 재조정하십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온전히 알지 못했음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삶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그래도 여전히 삶의 주도권을 포기하기 힘이 든다면, 잠언서 기자가 전하는 지혜를 들으십시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 19:21).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순절은 영적 재활 기간입니다.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할 시간입니다. 주님께 삶의 주도권 양도를 결단할 시간입니다.
혹시 주도권을 쥐고서 원하는 삶을 일구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셨습니까? 그러노라니 삶이 너무 힘들고, 무겁고, 지치진 않았습니까? 이젠 마음 편히 그리고 가볍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11:28-31). 아멘.

Friday, February 23, 2018

빌리 그래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자



빌리 그래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자
2018 2 21, 곧 지난 수요일 노스케롤라이나 몬트리트(Montreat, NC)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 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살아생전 빌리 그래함 목사께선 자신의 묘비에 새길 문구로써 요 14:6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묘비는 이렇게 새겨질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
NOVEMBER 7, 1918 – FEBRUARY 21, 20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자(PREACHER OF THE GOSPEL OF THE LORD JESUS CHRIST)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14:6)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시작하여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국 대통령들이 그에게 도덕적 또한 영적 자문을 구했고,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각국 지도자들조차 그와 개인적 친분을 맺길 원할 정도로 숱한 이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믿음의 거장이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그를 꼽는데 있어 그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아 보입니다.
19살 때 그가 살던 조그마한 마을에 모다카이 햄이란 전도자가 와서 천막을 치고 집회를 했는데, 친구들과 함께 구경 같다가 예수를 믿겠다 작정하고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후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일 정도로 그는 거듭났습니다. 기쁨이 쉴 새 없이 밀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큰 기쁨을 선물로 준 복된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을 돌면서 대규모 영적 집회를 열어 수많은 영혼에게 주 예수의 복된 소식을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어올리며 세상의 모든 해답은 이 작은 책 속에 들어 있다고 외치며, 사람들이 성경으로 되돌아가 성경 안에서 살도록 촉구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능력을 그만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들어보노라면, 설교 주제는 거의 바뀌지 않고 오직 예화만이 바뀔 뿐이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보다 높고 깊다는 확신 가운데 빌리 그래함 목사는 현대철학과 사고와 조화시켜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하기보단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진리의 증인이 되고자 힘써 노력했던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그는 참으로 본받고 싶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2018. 2. 25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교회력에 따라 사순절 영적순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특별히 기도와 말씀 묵상에 힘쓰고, 신앙생활의 변화 추구에 힘쓰기 바랍니다.
3. 속장/인도자 모임이 오늘 2부 친교 후 교육관에서 있습니다.
4. 교육관 지붕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여러 모로 힘써주신 북부 지방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5. 한인연합감리교회 총회복음으로 희망을 여는 한인연합감리교회란 주제로 뉴저지 아콜라 연합감리교회에서 49-12일 동안 열립니다.
6. “GROW-Large Church Initiative가 샌디에고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430-52일 동안 열립니다.
7. 춘계 교회 대청소317일 오전 8-정오까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동참 바랍니다.
8.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8) 헌화자, 1/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8.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고바비 집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February 20, 2018

광야로 들어가신 예수님





광야로 들어가신 예수님
1:9-13(2018 2 18일 주일예배)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른 한 사내가 소리 높여 외치고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자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듣고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에게로 나아온 자들을 요단 강가로 데려다 그곳에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도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군인들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왔습니다.
예루살렘과 인근지역에서 회개운동이 한창 불일 듯 일고 있던 때에 한편에서는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신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셨습니다. 왜요? 물론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께서 나아오는 것을 보고서 요한이 극구 사양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당신이 내게로 오셨습니까? ( 3:14). 하지만 예수께서 이렇게 화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합시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3:15) 그제서야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황송한 마음으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서 예수께서 물 밖으로 걸어 나오실 때 하늘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자기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날은 예수께 참으로 큰 감동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좇아 세례를 받으셨을 뿐더러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다가온 성령의 임재와 또한 너무나도 또렷이 들려온 아버지의 음성은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녕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날 요단 강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영께서 그것을 너무나도 분명히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확연히 입증된 상황에서 예수께선 곧바로 공생애 사역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노라면, 그것이 예수께서 원하신 바였는지 모릅니다. 준비가 온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요단 강에서의 감격스런 경험 후 곧바로 예수께서 광야로 내몰리셨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비둘기처럼 임했던 바로 그 성령에 의해서.
시시때때로 우리 역시 광야로 내몰리곤 합니다. 특별히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혹은 영적으로 큰 감동이 있은 후 급작스럽게 광야로 내몰리곤 합니다. 뜻하지 않게 광야의 시련과 맞부딪쳐야 할 때 무척 당혹스럽기도 하고 그 이유를 좀처럼 헤아리기 힘듭니다.
뜻하지 않게 광야로 내몰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런 광야 경험은 언제나 실패를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갑작스럽게 광야로 내몰린 것은 결코 그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떤 잘못을 범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뜻하신 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령이 곧 예수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광야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일까?”
흔히 광야는 사막, 경작되지 않은 땅,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곳입니다. 광야는 야생 식물과 야생 동물에게 속한 곳입니다. 광야는 음식과 신선한 물이 없습니다. 광야는 고독한 곳입니다.  광야는 절망으로 찌든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삶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내동댕이쳐져서 길을 잃거나,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사탄으로부터 시험 받은 후 무척 힘들어 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곧 광야는 극한 시련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삶 가운데서 경험하는 우리 자신의 육신, 정신 그리고 영혼이 철저히 깨어지고 망가진 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광야는 사탄의 유혹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곳입니다. 삶의 환경이 너무 힘들어 사탄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오는 곳입니다. 모든 게 도전적입니다.
오직 사탄의 유혹 소리만이 들려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넘어져 도저히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시험과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무서운 악의 세력과 대면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런 순간을 극복하기 힘듭니다. 그곳에선 도움이 필요합니다. 구원자를 절실히 필요합니다.
광야생활이 어떤 이에게는 잠시 동안으로 끝나지만, 어떤 이에게는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광야 훈련의 중요성을 간과해선 아니 됩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곧바로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체험 이후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광야 훈련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광야 훈련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화해, 치유, 온전함으로 인도하고자. 
그래서 우리가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화해, 치유,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훈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온전한 회복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발견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장소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광야에서 힘들어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사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광야가 우리 자신을 단련시켜 정금처럼 나아오도록 하는 훈련처소인데도 많은 경우 오히려 그곳에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맙니다.
비록 광야 시간이 무척 힘들고 도전적이긴 했지만, 그곳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입증할 장소였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은 예수께 이렇게 말하면서 끈질 지게 유혹하지 않았습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사탄이 우리에게 유혹을 던지면서 이렇게 도전합니다. “네가 예수의 제자라면, 너의 능력을 보여봐라. 네게 무엇을 가졌는지 입증해 봐라.”
성도 여러분, 광야 시험을 이겨냄으로써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 자신을 입증해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광야에서 온갖 시험을 이겨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시험을 이겨낸 승리자로서 광야에서 당당히 걸어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주 예수께서 40일의 광야 훈련으로 들어가셨다고 오늘 본문이 소개합니다. 
그래서 광야가 얼마나 힘든지를 주께서 익히 잘 알고 계십니다. 쉬운 길을 걷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가 홀로 광야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40일을 거하셨고, 그곳에서 온갖 시험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인내하며 끝내 승리하셨습니다.
광야에선 아무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철저히 우리를 외면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읽어보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3).
광야에서 40일 동안 밤과 낮으로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힘들게 시험 받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에 광야의 들짐승들이 예수님의 동료가 되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종종 광야로 몰아넣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훈련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 마치 광야와 같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고요히 거하십시오. 광야는 듣는 곳입니다. 굳이 급히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하기보단 들으십시오. 귀를 열어 들으십시오.
광야는 귀를 열어 듣는 곳입니다. 그리하면 삶을 위한 매우 중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고, 우리는 궁극적으론 밝은 빛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그러자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무엘 자신뿐만이 아니라 엘리 제사장 가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만약 듣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놓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정말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5).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를 그의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친구. 참으로 좋은 호칭이지요. 사실 이보다 더 좋은 호칭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친구.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라면, 그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광야 시험을 이겨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시시때때로 우리가 광야로 내몰리는 경험은 결코 실패가 아닌 성령의 인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광야에서 인내하며 40일을 견뎌내야 합니다. 실로 숱한 유혹이 다가옵니다. 40일 동안 밤과 낮으로 예수께서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선 끝내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혹이 다가온다 해도.
셋째로, 광야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훈련 장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로, 비록 광야에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예수께서 홀로 거하셨을 때, 사실은 들짐승들과 천사들 역시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순절 첫째 주간입니다. 사순절엔 광야로 굳이 내몰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자원해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로 들어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훈련 속으로 깊게 들어갈 수 있길 원합니다. 아멘?



Friday, February 16, 2018

하나님께로 방향을 재조정하는 사순절



하나님께로 방향을 재조정하는 사순절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신학의 거장 칼 바르트 목사는 신학의 위기,” 혹은 신학의 시험이란 글에서 신학을 위협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고독, 안으로부터 오는 의심, 그리고 위로부터 오는 진노라고 지적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자들이 첫째와 둘째 위기엔 민감하지만 셋째 위기는 가볍게 여기거나 많은 경우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합니다. 셋째야말로 가장 위험한 위기인데도 말입니다.
셋째 위기는 신학을 하는 자가 혼신의 열정으로 임하는 신학 작업으로부터 하나님이 떠나버린 비극적 사건입니다. 신학자가 열심을 가지고 신학을 공부하지만 그 수고에 하나님이 떠나버리셨다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춰버리셨다면?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런 수고를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칼 바르트 목사는 하나님이 떠나버린 신학을 이렇게 빗대어 묘사합니다. “물레방아는 돌아가지만 방앗간은 비어있고, 돛은 펼쳐졌지만 배를 움직일 바람은 불지 않으며, 우물이 있고 송수관은 연결되어 있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다. 학문은 있으나 그 대상의 권능 안에서 조명되는 일이 없다.” (다음 카페. "배우는 자의 기도"에서)
그렇다면 신학도가 그토록 열심히 성경과 기타 관련 문서를 파고 또 파고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런 수고를 외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신학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학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성경에서 자기 자신의 지식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학(神學)”하나님에 관한 앎, 지식, 곧 학문입니다. 지식을 위한 학습이 아닌 하나님을 깊게 알아가는 학습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학습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친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 모두가 주의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자 힘씁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많은 땀을 흘립니다. 하지만 그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하나님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을 위한 수고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곧 자기 자신의 의를 위한 수고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학도가 하나님을 알기 위한 학습이 아닌 자신의 명예를 위한 지식 쌓기 학문을 추구할 때 하나님이 떠나버린 것과 일반입니다.
지난 주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2018년 사순절 순례 속으로 들어섰습니다. 각자가 신앙생활을 스스로 점검해보고 재조정하는 순례기간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하나님께로 다시 초점이 맞춰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로 다시 정조준 되길 원합니다.

2018. 2. 18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교회력에 따라 지난 주 수요일(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사순절 영적순례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특별히 기도와 말씀 묵상에 힘쓰기 바랍니다.

3. 교육관 지붕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여러 모로 힘써주신 북부 지방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4. 2018년 가족 중보기도 카드를 담임목사께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5.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사건 희생자 가족들에게 주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6. 한인연합감리교회 총회가 “복음으로 희망을 여는 한인연합감리교회”란 주제로 뉴저지 아콜라 연합감리교회에서 4월 9-12일 동안 열립니다.

7. “GROW-Large Church Initiative”가 샌디에고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4월 30일-5월 2일 동안 열립니다.

8.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8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9.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포기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은?




포기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은?
58:1-12 (2018 214. 재의 수요일)
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니리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오늘 저녁 우리는 아주 특별한 목적 때문에 이곳에 모였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 모임은 이마에 재를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마에 재를 바르는 것일까요? (그림을 보며 잠시 생각할 시간)
한편으로, 교회력으로 오늘 저녁 모임은 재의 수요일 예배라고 부릅니다.
오늘 저녁의 이 특별한 의식은 사순절, 40일의 영적 순례로 들어가는 입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특별한 영적 훈련의 여정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과 실패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행했어야 했건만 하지 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저녁 우리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고,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함과 동시에 새로운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찾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무엇인가를 손에 잡으려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손을 펼치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달리 말해서, 무엇인가로부터 발길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향하여 발길을 향하도록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교훈을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포로생활에서 갓 돌아온 백성에게 외치도록 명하십니다.
죄악과 반역에서 돌아오라고. 그릇된 경건 훈련에서 돌아오라고. 없는 자들을 억압하는 횡포로부터 돌아오라고. 그릇된 언어생활에서 돌아오라고. 언쟁과 분쟁에서 돌아오라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실 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션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품고 계신 거룩한 꿈을 백성에게 전하십니다. 백성이 어디로 돌아가야만 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에 관한 꿈을 꾸라 하십니다. 억압 받는 자들이 놓임 받는 꿈을 꾸라 하십니다. 허기진 자들에게 양식이 나누어지는 꿈을 꾸라 하십니다.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옷이 나누어지는 꿈을 꾸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가슴에 맺힌 한이 치유 받는 꿈을 꾸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케 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자유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과 남을 헤치는 악행을 포기하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좀더 아름다운 것을 우리가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재의 수요예배 때뿐만 아니라 사순절 영적 순례 기간 동안 삶 속에서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할 부족함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선 아니 됩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슴에 품길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꿈, 더불어 믿음을 키워가는 우리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꿈, 또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한낱 먼지와 재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한한 재이기에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이 세상 유혹에 불타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하여 부활주일까지 사십 일의 순례 여정은 우리에게 실로 중요한 것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지와 재를 사용하여 무엇을 이루실 수 있는지, 곧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돌이켜 회개하여 변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8, 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바로 우리를 향한 축복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Tuesday, February 13, 2018

사랑과 섬김으로 믿음의 뿌리를




사랑과 섬김으로 믿음의 뿌리를
 25:31-40 (2018 2 11일 주일예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자 한다면또한 그 안에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자 한다면사람들을 섬겼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자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듯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보노라면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임금” 그리고 배고픈 자목마른 자나그네벗은 자병든 자또한 옥에 갇힌 자와 동일시하십니다.
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25:35, 36).
그러자 의로운 자들이 묻습니다.
주여우리가 어느 때에 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 25:37-39)
그러자 임금이 이렇게 화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25:40)
참으로 흥미로운 가르침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길 것을 강조하신 것일까요?
이유 중 하나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자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희생적 사랑의 진실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자목마른 자나그네벗은 자병든 자그리고 옥에 갇힌 자를 섬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실천하신 희생적 사랑을 우리 역시 본받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려는 노력은 우리 스스로가 겸손히 낮추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천국에서 높임 받기 위함입니다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최선의 길은 그런 자리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마음이 있거든여기에 그 길이 있다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찾아보거라내가 벗었을 때에 내게 옷을 입혀라내가 배고플 때 내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어라.”
필요에 처한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달리 말해서필요에 처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그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예배성경공부성도의 교제전도와 선교기타 등등.
그런데 신앙생활에서 가장 성숙미는 필요에 처한 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께서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10:45)
그래서 세계적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는 막 10:45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로 소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예수께서는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자기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김으로써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13:14, 15)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섬기는 자가 크냐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2:27)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뵈옵고 그를 섬기고자 한다면섬기는 자 중에 계신 예수께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추구할 값지고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성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추구할 값지고 귀중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온전히 배우며 살아가는 게 아니겠습니까그것 이외 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께서 섬기는 삶을 힘써 살다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고로 이 땅에서 호흡하는 동안 우리 역시 사랑으로 남을 힘써 섬기고 살다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을 반갑게 뵈올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했으면 합니다곧 사랑 안에서 섬김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그것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할 삶의 필수적 모습입니다더 나아가서뿌리 깊은 영성을 추구한다면섬김과 봉사의 삶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그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나길 소원합니다마찬가지로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매일마다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우리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매일마다 영적으로 성숙해갈 수 있을까요달리 말해서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날이면 날마다 깊게 그리고 넓게 뻗어나갈 수 있을까요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우리 역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은 건강한 뿌리체제를 내린 나무가 맺는 최고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이웃과 세상으로 깊숙이 뻗어나가야 합니다낮은 자리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자들을 섬김으로써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 그곳에 있는 자들을 섬김으로써.
혹시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반문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남을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간 결국 쪽박 차고 맙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요성경의 가르침 대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미련한 짓일까요?
그런 삶은 결코 미련한 삶은 아닙니다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삶의 멋과 맛을 알고서 살아가는 진정 성숙한 인간의 완숙미입니다.
비록 우리가 함께 읽진 않았으나 마 25:41-46에 보노라면임금으로부터 호된 꾸중을 받는 자들도 소개되어 있습니다임금은 그들을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 부르며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41)고 엄히 말합니다.
너무나 무서운 말씀입니다너무나 혹독한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그토록 혹독히 말씀하셨을까요달리 말해서도대체 그들이 어떤 나쁜 일을 했던 것일까요?
그들이 어떤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지적하고 있나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42, 43)
임금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그를 영접하지 않았고그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고그를 찾아가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임금이 굶주렸고목말라했고헐벗었고병들었으며옥에 갇혔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왼쪽에 선 자들이 임금이 그런 상황에 몰린 것을 직접 목격했다면최선을 다해 임금을 돕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임금은 그런 열악한 삶으로 내몰리지 않았습니다결단코.
그래서 왼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너무나 억울한 심정으로 임금에게 묻습니다. “주여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목마르신 것이나나그네 되신 것이나벗으신 것이나병드신 것이나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4)
그렇다면 임금과 왼쪽 편에 선 자들 중 과연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일까요도대체 누가?
진실은 이렇습니다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둘 다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왼쪽 편에 선 자들이 참된 말을 하고 있다면임금으로부터 그토록 혹독한 말을 듣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아니 임금이 그들에게 너무 막말을 한 게 아닙니까?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왼쪽 편에 선 자들에게 주어진 임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임금으로부터 그들이 호된 꾸중을 들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그렇습니다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가 배고파했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벗었을 때 입혀주지 않았으며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합니다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 중 허기진 자목마른 자나그네 된 자헐벗은 자 그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곧 그들의 임금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달리 말해서그들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 중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나라에 전도하고 선교하기 위해 선교비를 보내는 것은 기뻐합니다하지만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먹이고입히고돌보는 일엔 인색합니다왜 그럴까요혹시 그들이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도록 만들기 때문일까요왜 그럴까요?
찬송가 263(통합)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죠?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원하지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참으로 다행히도 요즘 우리교회의 한어회중이나 영어회중 가운데 필요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일에 열심을 보인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예로 들어서구세군 자선남비 동참암환자들에게 보낼 모자 뜨기 작업 등. . (실로 짠 모자 영상)
참으로 좋은 선행이 아닌가 싶습니다암이란 절망적 병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어린 환자들과 성인 환자들에게 손으로 직접 짠 모자가 큰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랑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더욱 많은 분들이 이러한 선행에 동참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억했으면 합니다건강한 믿음의 뿌리는 사랑과 섬김으로써 깊게 그리고 넓게 뻗어나간다는 사실을아멘?


Twitter Delicious Facebook Digg Stumbleupon Favorit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