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30, 2016

허기짐에 빵을 훔친 자는 처벌할 수 없다



허기짐에 빵을 훔친 자는 처벌할 수 없다
빅토르 위고의 대작(大作)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불쌍한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불쌍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책이라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장발장이란 불행한 인물의 삶이 단연 돋보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 라브리 마을에서 날품팔이하며 살아가던 노동자 장발장이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고픔 끝에 빵을 훔치려다가 체포되어 3년형 선고를 받고서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 밖에 남아 있는 가족의 생계가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틈만 있으면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벌이 3년에서 19년으로 늘어납니다. 하지만 다행히 13년만에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그땐 이미 그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목회 칼럼을 작성하고 있는 목요일 아침 인터넷 신문을 보노라니 며칠 동안 허기짐에 시달리던 한 이탈리아 여성(61)이 슈퍼마켓에서 비스킷과 참치 통조림을 훔치려다 붙잡혔는데, 경찰이 그녀를 처벌하기보단 오히려 점심을 사주었다는 훈훈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슈퍼마켓 주인은 도적질한 여인을 경찰에 즉시 신고하고서 그녀가 경찰서로 연행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그녀의 딱한 소식을 귀담아 듣고서 그녀를 경찰서로 연행하기보단 오히려 식당으로 데려가 점심을 사주었습니다. 그 여인이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경찰은 지역교회에 연락해 식료품을 기부 받아 그 여성에게 전해준 후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도둑질한 여성에게 그토록 과분한 조치를 취한 것은 그 경찰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가난하고 허기진 사람이 음식을 훔치는 건 범죄라고 볼 수 없다(It was not a crime to steal food if you are poor and hungry)"는 이탈리아 최고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랍니다. 그 신문기사 맨 끝엔 다음과 같은 실례까지 실려 있었습니다. "실제 이탈리아 최고법원은 지난 5월 배고픔에 지쳐 4유로(4930)어치 음식을 훔쳐 절도죄로 기소된 우크라이나 남성에게 징역 6개월, 벌금 100달러(11만여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에서 가장 최악의 사람도 굶을 순 없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이 판례가 빅토르 위고 시대에 만들어졌다면, 과연 여전히 장발장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었을까?" 물론 빅토르 위고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은 삶의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사뭇 다릅니다. 위고의 시대엔 환경 조건보단 준법정신이 강조된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엄격한 준법보다는 각자가 처해 있는 환경이 최대한 고려되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의 가치관 변화가 신문기사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허기진 배에 훔친 빵이 들어간 것을 나무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 견해이기도 합니다.    

Tuesday, September 27, 2016

희망을 품은 대로 이루어지리라



희망을 품은 대로 이루어지리라
아담이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떤 부류의 여자였을까요? 난 알지도 못하고 만족해했지."
"이젠 알고 싶소?" 새뮤얼이 물었다.
아담은 눈길을 떨어뜨렸다. "꼭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가 내 아들 속에 흐르고 있는가는 알고 싶어요. 내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내가 그들에게서 무언가 찾아내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렇겠죠. 그런데 내가 미리 이야기해두는데 그들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의심이 그들 속에 악을 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오. 당신의 기대대로 그들은 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핏줄이 있는데.
"나는 핏줄을 그리 믿지 않아요. 아이들 속에 선이나 악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태어난 후에 그들 속에 심어놓은 것을 후에 보게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돼지를 경마로 만들 수는 없죠."
"그야 말이 안 되죠. 그러나 대단해 빨리 뛰는 돼지는 만들 수도 있죠." 새뮤얼이 말했다.
이것은 존 스타인백의 소설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에서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두 아들을 출산한 아내 캐시가 악한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남편 아담에게 총상을 입힌 후 가출해 창녀가 됩니다. 그때 정신적 스승 새뮤얼이 아담을 와서 앞으로 두 아들을 어떻게 키울지 논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엄마가 추악한 여인이었다 할지라도, 곧 그들이 악 가운데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어떤 환경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성품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정론적 사고 속에서 두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던 아담에게 새뮤얼은 자유의지론적 사고를 주입시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새뮤얼의 말을 좋아합니다. 설령 사람이 선이나 악 가운데 태어났다 할지라도 출생 후 그에게 무엇을 심어주느냐에 따라 그의 성품은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고는 나의 목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기도 합니다. 지난날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이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또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수확 역시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나의 희망하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동일한 변화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하지만 분명한 진리는 선을 거두고자 한다면 선을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의심이 그들 속에 악을 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새뮤얼의 외침이 내 귀에 무척 강하게 들려옵니다.

Friday, September 16, 2016

감리사님과 만남을 가진 후



감리사님과 만남을 가진 후
지난주일 오후 5-7시 교회 교육관에서 북부지방 제임스 파월 감리사님(DS James Powell)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영어회중과 한어회중에서 교회 미래에 큰 관심을 가지고 다수가 참석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 모임에 함께 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날 모임에서 감리사께서 우리교회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 좋은 조언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특별히 그가 던진 숱한 질문 중 가장 도전적인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성전에 자물쇠가 채워진 후에도 지역사회가 여전히 우리를 그리워할까요? 교세 약화나 내부적 또는 외부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형국을 맞이하면, 그래서 교회 문이 닫힌다면, 교회가 사라진 후에도 지역 주민이 우리를 생각하며 아쉬워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뭇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말처럼 들리나 실상은 긍정적 생각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곧 작가가 글을 쓸 때, 부정과 부정을 합쳐 강한 긍정을 도출하는 것처럼. 그의 질문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교회로써 우리가 어떤 모습을 이웃사회에 각인시켜주고 있는가?
사실 지역사회가 품게 될 우리의 이미지는 우리 스스로가 창조합니다. 평소에 지역사회에 어떤 말을 전하고 어떤 행동을 보여주고자 수고했느냐에 따라 우리의 이미지가 그들의 마음에 달리 새겨질 것입니다. 물론 지역사회에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교회 문에 자물쇠가 채워지던 그렇지 않던 지역사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교회가 사라진 것 때문에 울지도 웃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별 상관없을 테니까.
감리사님의 질문은 지역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와 동시에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의 선교사명을 신중히 고민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로써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날 저녁 감리사님은 이런 도전적 질문도 던졌습니다. “현재 여기 계신 분들 중 20년 후에도 여전히 이곳에서 예배드릴 분이 있을까요? 글쎄 그 모임 참석자들 중 20년 후에도 여전히 생존해 계실 분이 몇이나 될까요? 그러면서 감리사님은 자신이 20년 가까이 팜데일연합감리교회(Palmdale UMC)에서 사역하면서 10살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목회를 했노라 말했습니다. 왜 굳이 그가 10살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췄을까요? 그것은 어린 아이들에게 목회초점을 맞추면, 결국 그 자녀들로 인해 그들의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회를 찾기 때문입니다.

20, 30년 후 교회를 이끌어갈 주역은 현재 10, 20대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는 미래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곧 기존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문화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려는 젊은이들도 더불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교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세대의 관심사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의 교회로써 지역사회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려고 부단히 힘써야 합니다.

Friday, September 9, 2016

진실은 손가락과 달 사이로



진실은 손가락과 달 사이로

어린 딸과 함께 캠핑 나간 아빠가 캄캄한 밤하늘에 떠올라있는 조그맣고 귀엽게 생긴 눈썹달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곁에 있던 딸 옆으로 바짝 다가가 딸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도우러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빠의 커다란 팔과 손가락이 딸의 눈을 가려 정작 눈썹달을 보지 못하게 만든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아빠의 커다란 팔과 손가락 속으로 달이 사라져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화가 잔뜩 난 딸이 소리칩니다. “아빠, 손 치워요. 아빠 손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단 말이에요.”

흔히 진리라 확신하는 것을 선전하려다가 오히려 그것의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달을 가리키려던 팔과 손가락이 오히려 달을 가로막아 버린 것처럼. 그래서 귀여운 딸에게서 눈썹달을 빼앗은 것처럼. 딸에게 눈썹달을 보여주길 원한다면, 아빠는 자신의 팔과 손가락이 달을 가리지 않도록 우선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나 자신은 세상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 진리의 빛을 가로막아 서기보단 그 빛을 세상에 반사해주는 반사체, 즉 진리의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나의 올바른 의무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선전하고자 나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활용하다가 그것을 너무 과도히 앞세운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을 잊거나 막아서기도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표현합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자 하건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달이 실종되고 마는 것처럼, 진리로 세상을 인도하려는 나의 노력 때문에 오히려 진리가 실종되고 있진 않는지 나 스스로를 성찰해 봅니다.

촤용덕 씨의낮엔 해처럼복음성가 가사처럼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고 싶은데... 그 꿈의 성취를 위해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텐데...

조심스레 이런 생각을 가슴속 깊이 담아 봅니다. “달이 내 팔과 손가락 속에서 실종되지 않았으면... 곧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진리가 왜곡되거나 묻혀버리지 않았으면...” 오히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진리의 반사체 되어 진리의 빛을 환히 비추어 세상이 진리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길 원합니다. 이것이 나의 삶의 바램이자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딸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눈썹달이듯 정작 내가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진실은 손가락과 달 사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는 말을 고이고이 되씹어봅니다.

Friday, September 2, 2016

현실과 팬텀 현실의 차이 구분하기


현실과 팬텀 현실의 차이 구분하기

팬텀 현실(Phantom Reality)”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상현실,” 혹은 가상 속 현실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는 감정, 고정관념, 가정 혹은 이상이란 렌즈를 착용한 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팬텀 현실에 갇혀 있노라면, 실질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적절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팬텀 현실의 피해자가 되면,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막대히 투자하면서도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국어사전은 현실(Reality)”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다는 의미입니다. 과학공상 소설 작가 빌립 딕(Philip K. Dick)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실이란 그것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할지라도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Reality is that which, when you stop believing in it, doesn’t go away).”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개의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면, 그 개가 몇 개의 다리를 가졌습니까?” 그 개가 몇 개의 다리를 가졌겠습니까? 링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넷입니다. 꼬리를 다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다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바라보다, 혹은 직시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숱한 문제를 풀어내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경우 현실과 팬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문제를 풀어내기 보다는 오히려 문제 속에 더욱 갇혀버리곤 합니다.

팬텀 현실로부터 현실을 구분해 내려면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물론 인간의 감정도 중요하나 문제를 풀어내는데 있어 감정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안목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당시 실질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고, 그 일의 동기가 무엇이며, 결과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때론 이 절차 속에서 가능한 한 감정을 과감히 배제할 필요도 있습니다.

요즘 사랑나무교회와 우드랜드 힐스 제일연합감리교회의 지난날 긴장관계를 좀 더 깊게 이해하고자 보관 중인 회의록들과 서신들을 면밀히 살피는 중입니다. 현실과 팬텀 현실의 차이를 구분 짓기 위하여, 또한 현실에 정확한 이해를 얻기 위하여. 그래야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님의 교회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다시 힘차게 노를 저으며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cf. 윗부분 세 문단은 How Did That Happen, Roger Connor & Tom Smith에서 발췌하여 번역해 올렸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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