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29, 2016

She Is A Soprano


She Is A Soprano
지난 주 목요일 오후 반스앤노블 서점 스타벅스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 젊은 부부가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서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내가 스타벅스로 직접 들어오는 문 바로 가까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있었던 관계로 그들이 들어오는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보아 하니, 가장 큰 아이는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로서 혼자서 걸어 들어왔고, 둘째 아이는 2살 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로서 엄마 품에 안겨 있었으며, 셋째 아이는 겨우 몇 달 정도 되어 보였는데 아빠가 끌고 있는 유아용 수레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빠가 유아용 수레를 끌고서 안으로 들어선 후, 첫째 아이가 따라 들어섰으며, 맨 뒤에 엄마가 둘째를 안고서 들어왔습니다. 엄마가 안으로 들어설 때 갑자가 엄마 품에 안겨 있던 둘째가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울음소리가 컸던지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갑자기 쏠렸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엄마가 한쪽 손으로 아이의 입을 막으려 하자 아이가 더 큰 소리로 울어댔습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탓인지 아빠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고서 앞쪽으로 총총 걸음을 했습니다. “She is a soprano.” 이 말은 직역하면, “저 아이는 소프라노이다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에선 어휴, 목소리가 너무나 커혹은 저 아이가 너무 크게 울어란 의미였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아빠가 그 말을 던졌던 간에 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나의 귀에 그의 말이 무척 귀엽게 들렸습니다.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임기웅변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무척 재치가 깃들어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아이를 향해 당장 울음 그치지 못해!”라고 다그쳤을 수도 있고, 혹은 아내를 향해 그 아이 울지 않도록 하지 않고 무엇해요!”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글쎄, 저 아이가 소프라노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그 상황을 모면했습니다.
그 아빠의 재치 있는 말을 듣고서 나는 혼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래. 화를 내더라도 재치 있게 화를 내는 법을 익히면 좋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조리 있게 익살을 섞을 수 있다면, 대화를 좀 더 부드럽고 유익하게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아이에게 화를 내더라도 듣기 거북한 표현을 걸러내지 않고 마구 사용하는 것보다 그 아이를 향한 평소의 희망과 바램을 섞을 수 있다면, 자녀교육에 좀더 큰 효과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품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Saturday, July 23, 2016

Air Conditioner on the Kim Building Roof

Air Conditioner on the Kim Building Roof













Friday, July 22, 2016

만약 내가 알았다면?



만약 내가 알았다면?
그러고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내가 왜 그 나리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
그가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의 인간이니까.”
자신의 그러한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럴까?”
그러더니 이미 한 바 있는 회한에 찬 말을 하였다. “만약 내가 알았다면?”
그 사건이 그를 짓눌렀다. 자신이 한 일에서 그가 일종의 수수께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스러운 상념에 잠겼다. ‘하나의 선행이 악행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늑대를 구출하는 사람은 곧 암양을 죽이는 사람이다. 독수리의 다친 날개를 치료해 주는 사람은 그 발톱에 대한 책임이 있다.’
빅토 위고의 저작 93에서 뗄마르가 깊은 고뇌에 홀로 잠겨 너털거린 독백입니다. 랑뜨낙 후작이 프랑스에 희망을 안겨줄 인물로 믿고서 그를 추종했습니다. 하지만 후작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곳에는 영락없이 피비린내 풍기는 잔인한 살상만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후회합니다.
그때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 프랑스 혁명시대였습니다. 군중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으나 사실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목숨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혁명완수를 위해 집단살상마저 쉽게 용인되었습니다. 고로 혁명대가 지나가는 마을은 온갖 노략과 이곳저곳에 널려 있는 싸늘한 시신들 그리고 검게 타버린 가옥만 남겨질 뿐이었습니다.
뗄마르가 고뇌 가운데 독백을 읊던 곳은 랑뜨낙 후작 혁명대가 지나가다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떠난 어느 한 마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랑뜨낙 후작의 혁명대에 빼앗기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알았다면?” 혁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혁명이 말하는 대의명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혁명완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군중의 목숨이 희생되어야 함을 제대로 깨달았더라면? 만약 그러했더라면, 물론 뗄마르는 랑뜨낙 후작을 추종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를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돕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땐 그는 몰랐습니다.

만약 내가 알았더라면?” 뗄마르의 고뇌 섞인 독백은 프랑스 혁명시대만이 아니라 오늘날 삶을 살아가는 내 자신의 입에서도 종종 흘러나옵니다. “만약 내가 알았더라면?” 하지만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기에 오늘이라 일컫는 시간 속에서 내 양심이 가르치는 대로,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옳은 것이라 믿는 바에 나의 온 마음을 주고 그것을 이루려 힘써 노력합니다.

Friday, July 15, 2016

우리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내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에 있습니다. 희망하는 항구에 도달하기 위해선 우리는 항해를 해야 합니다. 때론 바람을 타고 갈 때도 있지만 때론 바람과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항해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표류치 말고, 또한 닻을 내려놓고서 편히 누워 있어서도 아니 됩니다.
I find the great thing in this world is not so much where we stand, as in what direction we are moving: To reach the port of heaven, we must sail sometimes with the wind and sometimes against it - but we must sail, and not drift, nor lie at anchor.(Oliver Wendell Holmes)
이것은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09. 8. 29 – 1894. 10. 7)가 저술한 수필집 아침 밥상의 독재자(The Autocrat of the Breakfast-Table)에서 인용한 명구(名句)입니다. 사실 이 책은 1857-8년 동안 홈스가 아틀란다 월간(The Atlantic Monthly)에 기고했던 수필들을 모아 다시 출판된 것입니다.
참고로, 홈스는 미국 의학자, 시인, 수필가 그리고 평론가로 정평 난 인물입니다. 그는 뉴잉글랜드 명문가 출신으로서 미국사회에서 다방면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학부를 마친 후 곧바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습니다. 수려한 필치로 아침 밥상의 독재자, 아침 밥상의 교수, 아침 밥상의 시인 등의 유명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에 있다는 홈스의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하신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3:12-14).
표류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은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삶의 표류는 타인을 향한 비난이나 상황에 대한 원망과 책임전가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삶의 자세는 적극적으로 책임을 껴안는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설령 타인의 실수나 그릇된 판단으로 조성된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그 환경 속에서 본의 아니게 큰 피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표류한다는 것은 계획 없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직한 삶의 자세는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로서 우린 결코 표류할 수 없습니다. “표류할 수 밖에 없었노라변명해서도 아니 됩니다. 진취적 자세로 푯대를 향해 진군해야 합니다. 현재 조건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 그것을 이루러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긍정적 사고로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Tuesday, July 12, 2016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다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다
느헤미야 3 (2016 7 10일 주일예배) 
오늘은 퀴즈 하나 들려 드리며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질문: "나는 항상 존재한다그 어느 누구도 나를 본 적 없고앞으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나는 호흡하는 모든 이의 확신이자 희망이다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정답: "나는 내일이다."
이것은 "이집트 신들(Gods of Egypt)"이란 영화에서 스핑크스가 지혜의 신 토트(Thoth)에게 던진 질문이고몇 번의 오답 후 마침내 토트가 알아낸 정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성경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문짝을 달고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1).
대제사장 엘리아십은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여호와의 성읍을 재건하는데 앞장 섰습니다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 성읍 재건에 누구보다 앞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지도자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바가 아닙니다먼저 목회자가 팔을 걷어 붙이고 주님의 교회사역에 뛰어들어야 합니다목회자는 무엇보다 먼저 더욱 힘써 기도하고 말씀을 깊게 묵상하여 교회를 기도와 말씀 속으로 인도해야 합니다그리고 그와 더불어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목회자와 손발을 맞추어 교회 재건에 앞장서야 합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제사장 무리가 손발을 걷어 붙이고 예루살렘 재건사업에 달려들었던 곳은 양문(The Sheep Gate)이었습니다이 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해당했습니다 5:2에 의할 것 같으면양문은 벳세다 못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도).
그렇다면 예 당초 양문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요또한 제사장 무리가 유난히 그 문을 다시 세우려 뛰어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양문은 제사에 쓰이는 양들을 끌고 들어오는 문이었습니다양들을 깨끗이 씻어 들여온 곳입니다이렇게 볼 것 같으면제사장 무리가 양문 재건 사업에 앞장 선 이유는 그 문으로 제사용 물건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자신들에게 맡겨진 고유한 사역이 제사이기에 그것에 필요한 문을 건립하는 일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땀을 흘려 자신들의 손으로 손수 지어야 했던 것입니다.
양문을 건축한 후 제사장들은 할 일을 다했노라 말하며 손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양문을 중심으로 성벽을 계속 쌓아갔는데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준공했습니다 (지도).
그들은 단순히 제사사역에 필요한 부분까지만 헌신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양문을 중심으로 성벽을 계속 쌓아 올렸습니다참으로 본이 될만한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바로 이런 모범적 모습이 나타나길 희망합니다교회 재건을 위해 목회자가 누구보다 먼저 열심히 땀을 흘리고평신도 지도자들도 앞장 서서 땀을 흘리는 본을 보였으면 합니다.
참고로함메아 망대(The Tower of Hundred)란 이름이 지닌 의미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부합니다그 이름은 성벽의 높이(백 큐빅)를 가리킬 수도 있고아니면 백 개의 계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내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성벽의 높이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한편으로하나넬 망대(The Tower of Hananel)는 함메아 망대로부터 서쪽으로 이어져 있는데아마도 성전 곁에 있는 우물로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성읍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로 이어지는 성벽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위치했기에 북쪽에서 위협하는 적들을 막아내는 방어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 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제사장 무리가 땀 흘려 준공한 성벽을 계속 잇고자 여리고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특별히 이므리 아들 삭굴의 헌신이 돋보였습니다또한 하스나아의 자손들도 어문을 건축하여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서 자물쇠에 빗장을 갖추었습니다.
어문(The Fish Gate)은 예루살렘 성으로 진입하는데 중요한 입구입니다 (지도)오늘날의 다메석 문(Damascus Gate)과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습니다곧 이 문은 북동쪽으로 가기 위해 또는 북동쪽으로부터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교통요지였습니다그런데 이것을 어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로나 갈릴리 바다로부터 들어온 고기들이 대부분 이 문을 통과했고이 문 근처에 생선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4). 여리고 사람들과 하스나아 자손들을 이어 성벽 재건사업을 위해 므레못이 일어났고그 다음으로 므술람이 일어났습니다그런데 여기 소개된 므술람은 느 6:18절에 다시 나타나는데기회가 될 때 이 인물에 관하여 좀더 상세히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5). 드고아(Tekoa)는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으로써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매우 작은 도시입니다그런데 그런 작은 마을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매우 아쉬운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습니다그 마을 귀족들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not put their shoulders to the work)”라는 말은 소가 멍에를 지기 거절하였다는 뜻으로써 일에 의도적으로 동참하지 아니했다는 의미입니다.
드고아의 평민들은 하나님의 성벽과 문들을 중수하는데 땀을 흘려 동참했던 반면 그들의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드고아 귀족들 예루살렘 성벽 중건에 동참하지 않았을까요그 이유는 그들이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싫어 했고 또한 타인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길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노릇입니다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할 때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보호할 성벽을 쌓는 일에 헌신하지 아니한 그들은 느헤미야가 산발랏도비야게셈에게 퍼부었던 저주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권리도 없고명목도 없다” (느 2:20).
하나님의 전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모두가 한 뜻을 품고서 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합니다하지만 자기 고집과 현실적 안목 때문에 선한 사역에서 빠진다면그는 현실적으로는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기업도 없고권리도 없으며명목도 사라집니다.
한 그림자가 그의 옆에 숨어 있다가 급습했다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그 영감이 울며 말했다.
“마이어내 아들 마이어날 못 알아보겠니넌 지금 네 아비를 죽이고 있어내겐 빵이 있어네게 줄 빵도. . . 네게 줄. . .
그는 쓰러졌다하지만 그의 손엔 여전히 조그마한 빵 부스러기가 쥐어있었다그는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다하지만 다른 그림자가 그에게 또다시 덮쳤다영감은 신음소리를 내다 죽고 말았다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상관치 않았다.
그 영감의 아들이 아비의 몸을 수색해 빵 조각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다른 두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그들이 그에게로 덮쳤다다른 이들도 가세했다그들이 물러났을 때내 곁엔 두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그 아버지와 그 아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엘리 위젤의 암흑(Night) 중에서)
저 지난 주 토요일 참으로 슬픈 소식 하나를 접했습니다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였던 엘리 위젤이 소천했습니다 (사진)내가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그에 관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1986년 그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입니다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그를 인류에게 보내진 메신저(messenger to mankind)”이라고 불렀습니다.
책을 통해 또는 연설을 통해 그가 인류에게 전한 기억할만한 메시지가 숱하게 많습니다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이 고통과 굴욕 당하는 상황에서 나는 결코 침묵하지 않기로 서약했습니다우리는 한쪽에 설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중립은 가해자를 도와줄 뿐 피해자를 결코 돕지 못합니다침묵은 괴롭히는 자를 도울 뿐 괴롭힘 당하는 자를 결코 돕지 않습니다. (1986년 노벨상 수락 연설에서)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신앙의 반대는 이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무관한 자세입니다. (1986년 어느 인터뷰에서)
엘리 위젤이 남겼던 말이 가슴에 깊게 와서 닿습니다무관심그것이야말로 내 자신이또한 우리 모두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이고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그의 말대로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8-32절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더욱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시간관계상 모두다 읽진 않겠으나 그 어느 이름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한 사람한 사람이 땀을 흘려 성벽을 중건했기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가 매우 빨리 끝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성벽재건공사에 다양한 이들의 헌신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주님의 전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렇다면 이 선한 일을 위해 우리 각자가 쌓아 올릴 성벽은 어디입니까주의 성전을 지켜줄 성벽이 무너져 있는데우리 자신이 책임지고 보수해야 할 부분은 어디 입니까

Thursday, July 7, 2016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다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다
한 그림자가 그의 옆에 숨어 있다가 급습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받고서 놀란 그 영감이 울며 말했다.
마이어! 내 아들 마이어! 날 못 알아보겠니? 넌 지금 네 아비를 죽이고 있어. 내겐 빵이 있어. 네게 줄 빵도. . .”
그는 쓰러졌다. 하지만 그의 손엔 여전히 조그마한 빵 부스러기를 쥐어있었다. 그는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다. 하지만 다른 그림자가 그에게 또다시 한방 날렸다. 영감은 신음소리를 내다 죽고 말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상관치 않았다.
그 영감의 아들이 아비의 몸을 수색해 빵 조각을 찾아내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른 두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에게로 덮쳤다. 다른 이들도 가세했다. 그들이 물러났을 때, 내 곁엔 두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 아버지와 그 아들.
그때 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위의 이야기는 엘리 위젤의 흑야(黑夜, Night)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엘리 위젤은 1928년 루마니아 태생입니다. 열여섯 살 되었을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가족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가족을 잃었습니다. 전쟁 종료 후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그 후 4-50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수많은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엘리 위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책이 바로 흑야(黑夜, Night)입니다.
강제수용소로 유대인들을 싣고 가는 호송열차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열차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또한 빵 한 조각을 차지하려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비 인륜적 참상을 목격하면서 엘리 위젤은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서 신의 자비마저 의심합니다. 그 자신 역시도 너무나 힘들어 죽음의 문턱에 와있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마음을 고쳐먹긴 했으나 여전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과 고뇌 가운데서도 엘리 위젤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끝없는 암흑과 절망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대신 입을 열어야 할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증언할 의무가 있다고 믿고 열심히 책과 연설을 통해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을 고발했습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지워내고 싶으나 그것을 기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침묵함으로써 악에 동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1986년 한 인터뷰에서 내가 생각하기엔 무관심이야말로 악의 대명사이다 (Indifference, to me, is the epitome of evil)”라고 외쳤던 그의 말이 무척 강하게 들려옵니다.

Friday, July 1, 2016

벽을 부수면 된다



벽을 부수면 된다
작년 2월 중순경 교회 주차장과 잔디밭 사이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던 관목들을 잘라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주차장을 들어설 때마다 높다랗게 자라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아름다운 교회와 정원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감추어진 신비한 궁궐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와 정원을 굳이 가려놓을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철근으로 만들어진 울타리도 이미 설치되어 있는데 굳이 그 곁에 숱한 관목을 또 다시 심어 놓은 이유가 있을까?” 이유가 궁금해 몇몇 분들께 여쭈어 보았으나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전부터 있었으니까 그렇게 있는 것이란 설명이었습니다.
결국 정원사의 손길을 타지 않고 마구잡이로 자라도록 내버려진 관목들을 과감하게 잘라냈습니다. 그 결과 주차장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교회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회 정원에서 주차장과 길거리 차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잔디밭에 마련해 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시원한 바람이 아무런 막힘도 없이 솔솔 지나갑니다. 정원이 정원으로써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무성한 관목들을 제거한 후 그 자리에 레몬나무, 오렌지나무, 감나무, 대추, 아보카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수확한 열매를 나눠 먹기 위함입니다. 조경의 미를 고려해 가능한 난장이류(dwarf)로 선택해 심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키가 자라면, 또 다른 벽이 되지 않도록 알맞은 높이와 너비로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그 관목들을 잘라냄으로써 얻은 유익 중 유익은 교회를 지역사회로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는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교회와 지역사회가 온전히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아직은 멀고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외관적으로나마 교회가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렸던 벽을 우리 스스로가 헐어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존의 벽을 부수면, 그 벽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바로 그곳을 의미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태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있는 벽을 헐어냈으면 합니다. 한어회중과 영어회중 사이에 벽을 헐어냈으면 합니다. 교회와 지역사회 사이에 있는 벽을 헐어냈으면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해 벽이 헐리면 그것은 억압이요 탄압이지만 내부에서 스스로 벽을 헐어내면 그것은 갱신을 위한 시도가 됩니다. 곧 강제로 헐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헐어낼 것인가에 관한 차이점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 우리 스스로 헐어내고 또 헐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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