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9, 2016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조선 24대 임금 헌종의 장인은 홍기섭이란 사람입니다. 홍기섭은 젊은 시절 매우 가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기에 남의 것을 탐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청렴한 삶의 일화 하나가 명심보감(明心寶鑑)염의편(廉義篇)”과 야담집 청구야담(靑丘野談)에 소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 하인 하나가 솥을 열었는데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엽전 일곱 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종은 그 돈을 주인에게로 가져왔습니다. 홍기섭은 즉시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여놓았습니다.
그러자 유씨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말합니다. “남의 솥 안에 돈을 잃어버릴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주신 것인데 왜 그것을 받지 않습니까?” 그때 홍기섭이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내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갖겠는가?
그때 도둑이 꿇어 엎드리며, “소인이 어젯밤 솥을 훔치러 왔다가 가세가 딱해 놓고 갔습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후 도둑은 홍기섭에게 감복하여 도둑질을 그만두고 성실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道理)를 밝히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공자가 15세에 이미 도리를 배우고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추구했다고 하니 참으로 일찍이 눈이 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도()를 깨닫기만 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아니하면 그가 깨달은 도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도를 깨달았다면, 이젠 덕()을 쌓아야 합니다. ()이란 순수한 한글로 표현하자면 다움일 것입니다. 도를 깨달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덕을 쌓고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곧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다우며, 백성이 백성다운 모습이 바로 덕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번지(樊祗)에게 이런 교훈을 줍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한다면 지()라 할 수 있다.” 그 가르침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오직 힘을 쓰되, 알 수도 없는 귀신 따위엔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도둑에게도 지켜야 할 도()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마땅히 지켜야 할 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를 알고서 지켜 행하려 힘쓴다면, 그는 사람다운 사람, 곧 삶 속에서 덕을 몸소 쌓고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Friday, April 22, 2016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
그러자 생명은 그 아리따운 귀를 막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 . 우리 두 사람은 진정 선한 일도 악한 일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우리는 선과 악의 저편에서 우리가 머물 섬과 우리 둘만의 푸른 초원을 찾아내지 않았는가우리 단 둘이서그러니 우리는 이제 서로 화목해야 한다! (나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지난 20대 대한민국 국회위원 선거에서 실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집권 여당 새누리당이 제일 야당 더민주당에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새누리 122(비례대표 17석 포함), 더민주 123(비례대표 13석 포함). 더 나아가선거를 한 달여 남겨두고 새로운 당을 꾸린 국민의당은 지역구에서 25석과 비례대표 13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물론 정의당도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4석을 차지했고무소속도 11석이나 당선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집권 여당이 금번 선거에서 패해도 너무나 끔찍하게 패한 것입니다더군다나지난 19대 국회의원 선거 때와는 달리 극소수를 제외하곤 야당에서 단일화된 후보를 내지 못하고 분열된 상황에서 치렀던 점을 고려할 것 같으면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여당에게 유리했건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여당으로부터 돌아서버린 민심 때문입니다총선승리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기보단 다음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러 당내 계파간 싸움이 선거막판까지 극하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물론 범야권은 총선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지역별로 크게 나누어졌습니다더민주당은 대구와 부산울산경남에서 몇 석을 건져 올린 성과를 거두었으나 여전히 서울과 경기도를 기반으로국민의당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당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물론 정치는 권력의지즉 집권을 향한 열망일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결코 어떤 자리에 올라 자기 세력을 과시하기 위함은 아닙니다또한 자기 세력을 키워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함도 아닙니다그것은 지난날 독재자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정신병과 흡사합니다.

니체가 지적한 권력의지,” 혹은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는 자기 자신을 위해 힘과 권세를 얻어 그것을 지속하기 위한 열망이 아니라 푸른 초원을 향해 나와 너가 함께 달려가기 위함입니다곧 권력은 자기욕망 추구가 아니라 모두의 욕망 추구이고과거지향적이 아닌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이런 점에 있어서금번 새롭게 국회에서 일할 국회의원들이나 정당들이 더 이상 선거 결과나 의석 숫자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시대의 흐름을 읽었으면 합니다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것을 달성하러 온 열정을 쏟아 부었으면 합니다.

Friday, April 15, 2016

오바마 대통령 쿠바 방문



오바마 대통령 쿠바 방문

지난 달 넷째 화요일, 322,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에 가서 그곳 국민에게 전한 역사적 연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젠 금수조치를 해제할 때가 왔습니다(It's time to lift the embargo).” 오바마 대통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금수조치를 해제해야 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미국이 지금껏 추구해왔던 봉쇄정책이 뜻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인정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냉전시대에 고안된 고립정책은 21세기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의 40분 연설 속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과 쿠바 간에 쌓이고 쌓인 캐캐묵은 반목과 앙금을 떨쳐내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 물씬 담겨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대통령이 쿠바에 방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1959년 이후 그 역사적 사건을 일구었습니다. 물론 두 나라 간 이념의 벽이 여전히 너무 높은데,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아직 신뢰관계가 충분히 쌓이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서두른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이념 잔재를 안고서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냉전시대의 마지막 잔재를 묻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나는 쿠바 국민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양국 간에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 그런 차이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화해와 공존을 향한 꿈을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앞으로 두 나라가 머리를 맞대고 하나하나 풀어나갈 과제일 뿐입니다.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의 인권문제가 바뀔 필요가 있다는 점도 조심스럽게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는 미국은 쿠바의 변화를 강요할 능력이나 의도도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변화는 쿠바 국민이 선택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연설 중 미국과 쿠바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못한 현안문제들에 관한 질문이 주어졌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지혜로운 답을 했습니다. “(1959년 이래로 우리는 지정학적 정치현안과 이해관계 올가미에 갇혀 살았습니다.) 나는 그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묶여 있길 거부합니다 (I know the history, but I refuse to be trapped by it).”

쿠바 방문 공식 행사 후 오바마 대통령과 쿠바 대통령 카스트로가 나란히 앉아 라티노아메리카노 스타디움에서 미국 프로야구팀 탬파베이 레이스와 쿠바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Friday, April 8, 2016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효림 스님이 썼던 힘든 세상, 도나 닦자에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너희들도 산중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못난 사람, 재주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을 지키는 주인이 되고 불교계의 거목이 되는 것이다. 부디 조바심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깊게 생각하고 마음에 담을만한 교훈이 담겨 있지 않나 싶습니다. 효림 스님의 말씀대로 자태가 아름다운 나무는 사람의 눈에 쉽게 뜨여 조경수로써 사용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식되거나 아니면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필요로 하는 행사 장소에 사용하고자 일회용 장식용으로 잘려나갈 위험이 큽니다. 또한 곧고 길게 잘 자라난 나무 역시 집을 짓는 재목으로 잘려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나무가 다른 곳으로 이식되어 조경수로 쓰이거나, 일회용 장식용으로 쓰이거나, 혹은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쓰이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닙니다. 그런 나무는 나름대로 적당한 곳에 쓰임 받았으니까 자기 자신의 도리를 다한 셈입니다.
하지만 나무가 씨앗이었을 때부터, 그것을 품어주고, 물과 양분을 공급해 주면서 싹이 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크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 어머니와 같은 산에게 은혜를 갚는 것은 자신이 자라난 바로 그 장소에서 산과 함께 오래 동안 공생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산과 함께 노래하고, 산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익을 감당하는 것은 산으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자라난 나무로써의 효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혹시나 많은 비가 내릴 때면, 거센 빗물에 의해 산의 일부가 휩쓸려가지 않도록, 곧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산의 토양을 붙들어주는 것은 산 자체가 아니라 그 산에 있는 나무들과 풀들입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산을 지키는 나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일찍 다른 곳으로 팔려나가는 나무보단 비록 볼품 없고 인기는 없으나 산과 함께 오래 동안 머물며 산을 지키고 있는 못생긴 나무임이 분명합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는 거목이 된다"는 효림 스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서 바깥세상의 화려함이나 명예를 탐내지 않고 현재 위치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Friday, April 1, 2016

알고자 하는 것과 갖길 원하는 것의 차이


알고자 하는 것과 갖길 원하는 것의 차이

얼마 전 뉴스 위크(News Weeks)에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하다가 죽었던 한 과학자에 대한 글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골수암으로 투병하다 안타깝게도 62세에 세상을 떠났던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Sagan) 박사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에 관해서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좀 더 깊게 알고자 여러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많은 교회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없인 확실할 수 없고, 확실하지 않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어느 날 그가 어떤 목사님과 믿음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도중 그는 목사님에게 도전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까?”

그 둘 사이에 대화가 계속 진행되던 중 목사님이 이렇게 바꾸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 그러자 아내를 무척 사랑하던 그는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질문을 살짝 바꾸어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입증할 수 있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랑은 입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입증할 수 없으나 부정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존재하고 있던 셈입니다.

목사님과의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칼 세이건 박사는 신앙이라는 것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입증할 수 없다고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사후에 그의 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남편은 믿음을 갖고자 노력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알고자 했을 뿐입니다.”

알고자 하는 것과 믿음을 갖고자 하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을 아는 사람과 그것을 소유한 자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도마처럼 만사를 제쳐놓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주관에 맞추려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믿음을 갖기 힘듭니다. 믿음이 보도록 하지 보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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