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5, 2019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4-22 (2019 8 25일 남선교회 헌신예배)
본문에 소개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 터키의 알라쉬어(Alaşehir)로 불리는 곳입니다(지도 PPT). 당시엔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에게해에서 아시아의 중심으로 뻗어나간 로마의 도로가 관통했기에 일찍부터 금융, 무역, 직조, 제약기술이 집중적으로 발전한 최고의 상업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의 대지진을 겪으면서 옛 도시 모습은 거의 모두 땅속에 함몰되어 남은 유적은 별로 없습니다.
바로 이 번성한 상업도시에 어느 날 바울의 동역자이기도 한 에바브로가 복음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그의 전도활동은 무척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교회의 열정이 식어갔습니다.
한편으로, 당시에 활달한 상업발전 덕분에 라오디게아는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물며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마저 이렇게 자화자찬을 했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 그런데 경제적 부유함이 늘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 부유함이 신앙적 부유함으로 연결되는 게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정말로 부요했을까요? 부요한 고로 부족한 게 없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자신들에 관해 어떤 주장을 했든 간에 진정 중요한 것은 주 예수께서 그들에 관해 이런 평가를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 이것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세워진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평가입니다. 곧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한 따끔한 책망입니다.
주께서 보셨을 때,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영적으로 차지도 덥지도 않았으며, 그저 미지근한 상태였습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심 곧 열정이 그들에게서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보셨을 때, 그들은 한없이 딱한 자들로 보였을 뿐입니다. 주님의 눈엔 그들은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으며,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요구를 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물론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인내를 통한 믿음”, “흰 옷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도의 의롭고 올바른 행실”, 그리고 안약영적 눈을 밝히는 기도와 말씀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로 연단한 금, 흰 옷, 그리고 안약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 직접 사야했습니다. 곧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힘써 찾고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따끔한 조언을 덧붙이셨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주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하셨기에, 참으로 아끼셨기에, 따끔한 책망과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열심을 낼 수 있었겠습니까? 열심을 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열심, 열정(zeal, enthusiasm)”이란 단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영어사전을 보니까 “enthusiasm”이란 단어 유래를 이렇게 친절히 설명을 하더군요.
쉽게 말해서, “열심, 열정(en-th(o)us-iasm)”신에게 사로잡힌 마음, 생각(사고), 행동,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곧 열심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려면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생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성도들이 이제부터라도 부유한 경제적 환경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힘써 하나님을 갈망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곧바로 이어진 구절을 살펴보면, 주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구절은 세상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 영적으로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주 예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려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더불어 먹고 마시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열정(zeal), 열심(En-th(o)us-iasm)”의 의미가 확실해졌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열심을 낼 수 있는지, 어떻게 열정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열심이 필요합니다. 열정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한? 하나님을 위한 열심, 열정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것은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만은 아닐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명령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주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너무나 아끼시기에, 이렇게 간곡히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를 열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흔히들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lukewarm Christians)”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날에도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lukewarm Christians)”이 너무나 많습니다. “미지근한(lukewarm)”따뜻하긴 하나 간신히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문을 들어보자면, “잠시 잊혀진 뜨거운 커피는 차가워지기 전에 미지근해집니다.”
어느 기독교 유머집을 보니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더군요. 어느 도시에 냉하고 미지근한 제일연합감리교회(First Lukewarm United Methodist Church of the Apathetic)”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너무 지루하지 않고, 너무 쉽게 흥분되지도 않습니다. 우린 미국 문화에 적합한 기독교 사고를 지향합니다. 고로 너무 느린 찬송이나 너무 빠른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다. 물론 너무 오래된 찬송이나 70년대 이후 복음성가도 부르지 않습니다. 성도들을 강하게 도전하지도 않습니다. 성도들이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가 너무 확고하거나 헌신적이지 않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인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룩 웜(Mr. Luke Warm)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의 신앙은 차거나 뜨겁지 않았습니다. 하나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고, 교회는 가끔씩 출석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는 직장에서 매우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종종 낚시를 하러 밖으로 나갑니다. 교회. . . 그것 참 좋죠. 하지만 잘 알다시피,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순 없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 역시도 미지근한 교회, 미지근한 성도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신약성경의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라. 회개하라회개하여 성령으로 충만하라란 의미입니다.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발히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 모두가 주를 위하여 활활 불타오른 열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2:11에서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권하십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아멘.
혹시 골디락스 원리(Goldilocks Principle)”를 들어보셨습니까? “무엇이든 적당한 정도란 의미입니다. 줄곧 중용이란 말로 표현되곤 합니다. 이 용어는 골디락스와 세 마리 곰(Goldilocks and the Three Bears)” 동화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골디락스란 어린 소녀가 숲 속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오두막집을 발견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맛 있게 보인 세 그릇의 국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째 그릇에 담긴 국을 맛보았더니 너무 뜨거웠고, 둘째 것은 너무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셋째 그릇은 적당할 정도로 따뜻해서 그것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그리고 세 의자를 발견한 골디락스가 앉으려 했는데, 첫째 의자는 너무 딱딱했고, 둘째 의자는 너무 푹신했으며, 셋째 의자는 앉기 좋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의자에 앉았는데 그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좀 더 집안을 둘러보았더니, 세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첫째 침대는 너무 딱딱했고, 둘째 침대는 너무 푹신했으며, 셋째 침대는 적당히 푹신했던 고로 골디락스가 그 위에 누었다가 그만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그 집 주인들이 돌아왔는데, 그들은 엄마, 아빠, 그리고 어린 새끼 곰들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가 그릇에 담아 놓은 자신들의 국물에 손을 댄 것과 부셔진 의자 그리고 엉망이 된 침대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 곰들의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골디락스는 침실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있는 힘을 다해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골디락스 원리(Goldilocks Principle)”가 사용되는 경우가 이렇습니다: 경제, 인지과학, 발달 심리학 (in economy, cognitive science and developmental psychology) 그리고 천문학에서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 in astronomy)”이란 용어로 사용됩니다.
신앙생활 여정 가운데 경계해야 할 것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적당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매니아(mania)”란 말이 있죠? 한국어로는 혹은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매니아, 예수 매니아, 교회 매니아가 되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꾼, 예수꾼, 교회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미지근한 신앙에서 벗어나 열심 있는 신앙을 추구합시다. 회개하여 마음 중심에 주 예수님을 모십시다. 성령님을 모십시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20-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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