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9

내려놓음





내려놓음
(Isa) 53:1-12; (MT) 4:1-11 (2019 414일 주일예배. 종려주일)
교만한 당나귀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한지라 무척 멋지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왕과 함께 그 나귀에게도 갈채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큰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습니다. 백성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이 없으면,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화가 난 왕이 즉시 나귀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순절 첫째 주일에 말씀 드렸던 예수님의 40일 광야훈련을 여전히 기억하시나요? 사실 그 광야훈련의 주제는 내려놓음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권리와 영광까지 모두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광야 금식기도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안위, 명예 그리고 영화를 위해 신적 지위와 권능을 사용하라는 사탄의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 자신을 위해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삶의 안락함을 추구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인기와 명예를 좇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만일 네가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모든 나라를 너에게 주겠다는 사탄의 말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부귀영화를 좇으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물론 예수께는 자유의지가 있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사실 광야 40일 금식을 하며 예수께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본분이 있었습니다. 남은 생애 동안 그 본분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하셨다면, 최고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굳이 사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이 그에게 온통 쏠렸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일 것이다. 바로 이 사람이 우리가 기다렸던 그 메시아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으로 오를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그를 환영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길 위에 펼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꺾은 나뭇가지를 펼쳤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걸어가던 사람들과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소리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복이 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이 화답했습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복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1-11).
그날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으나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관심과 높은 인기를 자기 자신을 위해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몸을 원수의 손에 기꺼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껴안았습니다. 야유를 받고, 침 뱉음 받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창에 찔렸습니다.
그 당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의 처참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2, 3)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그가 세인의 관심과 인기를 뒤로 하고 굳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며, 고난을 받아야 했던가요? 그 대답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 6)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 죄악의 대가가 그토록 끔찍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가 우리 죄 된 것입니다. 우리 죄가 그토록 엄청난 징벌을 그에게 불러왔던 것입니다.
예수께 우리 죄를 전가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 성취를 위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는 기꺼이 내려놓으셨습니다. 부귀영화, 자기 만족, 행복 추구 등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란 의식조차도.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었습니다.
C.S. Lewis스크루테잎의 편지이란 책에 보노라면, 우리 인간의 뜻을 부추기는 사탄의 끊임 없는 유혹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스물 한 번째 편지에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 만한 가치가 있지. 인간들은 노상 제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릴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 일이야.
현대세계가 순결에 그렇게나 반발하는 것도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육체라는 광막하고 위험천만한 땅, 세상을 만들어 낸 에너지가 고동치는 그 땅에 자신들의 동의로 거하게 된 것도 아닐 뿐 더러, '다른 이'의 뜻에 따라 그 땅에서 물러나야 하는 주제에 말이지!
이런 인간의 착각은, 어떤 왕이 아들을 사랑해서 거대한 영토의 명의를 준 후 실제 통치는 현명한 조언자들에게 맡겼는데, 막상 그 아들은 놀이방 바닥에 널린 집 짓기 장난감들처럼 그 모든 도시와 숲과 곡식도 진짜 제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나 진배 없다.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불어넣는 데에는 교만 말고도 혼동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이 소유격의 다양한 의미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거지. '내 장화' 로부터 시작해서 '내 개', '내 하인',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상관', '내 나라'를 거쳐 '내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달라지는 그 의미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라는 거야. 인간들을 잘만 가르치면 이런 의미들을 모조리 '내 장화'와 같은 뜻, 즉 소유를 나타내는 ''로 국한 시킬 수 있다.
인간이 완전히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나오지 뭐냐. 종국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모든 인간에 대해 원수나 우리 아버지 둘 중 한편이 '내 것'을 주장하게 될 게다. 그러니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인간들도 결국엔 자기 시간, 자기 영혼, 자기 육체가 과연 누구 것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여하한 경우에도 저희들 것은 절대 될 수 없지.
이렇게 볼 때, “지옥의 단 한 가지 법칙, ‘나는 내 것이다’”(조지 맥도널드)란 말이 옳아 보입니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말년에 뮐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선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16:24).
주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시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연습을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영적 필요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연습이 지속될 때, 우리 마음에 참된 자유와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4:7, 8)
성도 여러분, 거룩이란 말이 있죠? 거룩은 실제로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지 평가할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입니다. 곧 삶이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좇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내려놓음을 잘 표현하는 기도문이 있어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보여지고 알려지고 들려지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각과 말 속에 계시옵소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고도 조용한 노력 속에 계시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겸허하고도 성실한 수고 속에 계시옵소서.
과장도 아니고, 허식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버려진 자들을 불러 모으시나이다.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머지않아 내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곧 다가올 풍성한 영광, 완전한 영광을 내가 보리니,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내 모든 소원을 이루시며,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나의 전부가 되시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그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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