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12, 2019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Romans) 12:1-8 (2019 2 10일 주일예배)
나침반 인생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 질문은 이렇게 이어질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부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씩 드리고자 무엇보다 먼저, 오늘 아침엔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배 자세와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이 있는 사랑을 나누고, 그분께 영광 올려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적에 이끌린 삶, 즉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추구하려면, 예배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노라면,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광야교회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 체결 후 그 백성이 광야에 장막을 치고 거하도록 하셨는데, 북쪽에 세 지파, 남쪽에 세 지파, 동쪽에 세 지파, 서쪽에 세 지파가 자리 잡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중앙에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이스라엘 백성 한 중앙에 자리잡고 있기에 그들이 광야 여정 중 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는 존재합니다. 예배야말로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우리 삶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삶의 분주함이 예배를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강조하는 차원에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존재합니다. 고로 이 세상 어떤 일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삶의 최우선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예배가 무엇일까요?
A. W. 토저(Tozer) 목사께서 예배를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배란 철학자들이 말한 그 첫 원리, 하지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로 그 태고의 신비와 위엄의 임재 안에서 우리가 겸허하지만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감탄과 경이 또한 넘치는 사랑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릭 워렌 목사(Rev. Rick Warren)께서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다. . .  항복은 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게임에서 지거나 강한 상대에게 양보하는 것과 같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자비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린다. 하지만 이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910, 19).
더 나아가, 릭 워렌 목사는 예배를 계속 이야기하면서 롬 12:1-8에서 소개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12:1)
그리고 이쯤 해서 잠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다는 의미를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혹은 항복한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것이나 숙명론적인 것, 또는 게으름에 대한 핑계가 아니다.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것, 또는 변화해야 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린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을 위해 영적 싸움터로 부름 받는다.(목적이 이끄는 삶)
C.S 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많이 항복할수록 우리는 더 진정한 우리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 모두를 다르게 창조하셨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인격으로 내 안이 가득 채워질 때에 비로소 나는 진정한 인격을 갖기 시작한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다투지 말라. 만약 네가 그와 화해하면, 마침내 너는 평화를 얻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다. ( 22:21)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예배의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윌리엄 템플 경이 말했던 예배의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배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거룩함으로 인해 우리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그분의 진리로 우리 마음이 양식을 얻고, 그분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 생각이 정화되고, 그의 사랑으로 마음이 열리는 것이며, 가장 이기심이 배제된 의지로써 그분의 목적에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죄이자 모든 죄악의 근원인 자기 중심적 사고가 치유될 수 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향한 깊고 뜨거운 감정(deep and strong feelings for God)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향한 깊고 뜨거운 감정이란 하나님을 향한 열망, 감격, 경외, 감사와 같은 감정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스쿠네오(proskuneo)란 헬라어가 예배(worship)”를 의미하는 단어로 신약성경에 자주 사용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프로스쿠네오(proskuneo)”예배(worship)”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 손에 입을 맞추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인 앞으로 나아갈 때, 종이 주인을 향해 갖는 존경과 경의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한 경외심과 존경의 표시이자 애정의 최고 표현입니다.
또한 예배의 정의를 생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물론 예배의 대상, 즉 우리가 나아가 무릎 꿇고 앉아서 손에 입을 맞추어야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예배는 예배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의 필요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예배는 예배자의 만족이나 쾌감을 얻기 위함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자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중심 곧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만 모아져야 합니다.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영광과 위엄과 지혜와 거룩함과 선하심을 생각하면서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워낙 소비자 중심으로 흘러가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교회 예배가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오해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관람하려 모인 관객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천하만물을 조성하신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느끼고 있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려 힘써 노력하는 배우들입니다. 
어느 날 주일예배 후 교회를 빠져나가며 어느 한 남성이 예배 찬송에 관해 불평했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선택한 찬송가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화답했답니다.  형제여,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찬송하고자 노래한 것이 아니니까요.”
실로 위대한 설교가였던 헨리 워드 비피처 목사께서 어느 교회를 섬기고 계실 때였습니다. 비처 목사님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 받던 매우 인기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초정 목사(비처 목사의 형제)가 대신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날 역시 비처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수많은 사람이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초청 목사가 단 위에 올라오자 실망한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빠져나가길 시작했습니다.
그때 강단에 오른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헨리 워드 비처 목사께서 아프셔서 부득불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로 들어가기 앞서 특별 광고를 하나 할까 합니다. 지금 자리를 뜨시고 계시는 분들 이외에 혹시 이곳에 헨리 워드 비처 목사를 예배하러 오신 분들이 계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퇴장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 자들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러자 교회 안이 곧 잠잠해졌고, 그날 예배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넘쳤습니다.
혹시 아셨습니까? 우리가 예배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 간음을 하고 있는 것임을?
참고로,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 열 개의 계명들로 이루어졌는데, 열 계명 중 앞쪽 세 가지가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20:2-7). 첫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셋째,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계명 준수보다 중요한 것이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특별히 예배의 대상을 혼동해선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계실 때,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헌신하셨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대적 사탄도 예배의 중요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기 전에 사탄, 곧 루시퍼가 맡았던 역할이 하나님의 찬양대를 이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맨 사탄은 마지막으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도전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 자신에게로 옮기도록 예수님을 유혹한 것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였느니라.” ( 4:8-10)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사탄은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탄은 우리가 사탄 자신을 예배하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사탄숭배를 거부하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을 흐려놓습니다. 물질이나 명예 혹은 건강이나 생의 행복과 같은 것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식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우리의 삶을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의 관심을 예배에서 분주하고 바쁜 일로 돌려 놓습니다.
프랑스 속담입니다. “좋은 음식은 허기짐에서 시작된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음식을 맛 있게 먹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맛있습니다.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 앞으로 나아오면, 늘 채움 받을 것입니다. 곧 효과적인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 굶주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바로 이런 열망과 굶주림이 있었으면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있는 사랑을 나누고, 그분을 높여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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