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18, 2019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 1:26-31 (2019 8 18일 주일예배)
폴 프레드릭 마이어하임(Paul Friedrich Meyerheim)이 공식적 원작자로 알려지고 있는 두꺼비 왕자(The Frog Prince)”란 동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각 문화와 풍습에 따라 여러 번역으로 각색되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 번역본들 중 하나를 소개해 봅니다.
옛날 옛적부터 전해온 이야기에 의할 것 같으면, 어느 잘 생긴 왕자가 짓궂은 마녀의 마술에 걸려 그만 두꺼비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에서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리따운 한 공주로부터 입맞춤 받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마녀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확신을 했습니다.
한편으로, 동시대에 아리따운 한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 멋진 왕자와 결혼식을 기다렸으나 그녀의 생애 동안 그런 왕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공주가 작은 호숫가 숲에서 혼자 거닐다 숲 속에서 아주 못생긴 두꺼비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공주가 호숫가에 앉아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며 잘 생긴 왕자가 나타날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 개구리가 공주에게로 뛰어올라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실재론 매우 잘 생긴 왕자라고 말을 건넨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면, 본래 모습으로 회복되어 그녀와 결혼해 평생토록 그녀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노라 약속했습니다.
처음엔 두꺼비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려 주춤거렸으나,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공주가 두꺼비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그랬더니 두꺼비가 멋진 왕자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왕자는 공주와 결혼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두꺼비 왕자 우화는 단순히 어린이 동화로 치부해 버리기엔 담고 있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그 이유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사랑하며 살아가지 못한 채 두꺼비 모습, 즉 겉모습만 보고 실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비하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 그림 PPT)
그래서 돌아온 탕자란 책에서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불만을 낳은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불만을 양산하는 문화 속에서 자기 자신이 힘들어하고 있진 않는지 스스로를 진단해보기 바랍니다. 달리 말해서, 개인적 능력이나 상황을 생각할 때 자꾸만 움츠려 들게 몰아가는 부정적 감정 때문에 자기 자신을 비하하진 않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참 모습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불만을 낳는 문화 속에서 힘들어하는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나와 여러분을 친히 창조하셨다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26절 상반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모습 그대를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지 결코 진화의 산물이 아닙니다(원숭이 진화 그림 PPT).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장 나중에 만드신 창조의 걸작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모양(Image)”은 히브리어로 -(tseh'-lem)”인데, “그림자, 유령, 환상, 닮음, 이미지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형상-우쓰(히브리어)닮음, 같음; 모델, 형상이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의 깊은 영성 안에서 우리는 지적이고 독립적 개체로 창조되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도덕적 완전과 성결 속에서 창조되었습니다.
(3)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 창조는 다른 피조물 창조에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각별한 마음씀씀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피조물 창조는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 1:3).
또한 이미 만들어 놓은 개체들에게 이런 식으로 명하셨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하시매, 그대로 되어”(9). 곧 말씀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 때는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26).
단순히 말로만 하기보단 그가 손수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체가 서로 협력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란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을 하고, 뜻을 갖고 행동합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처럼 우리 인간에게 사고, 언어, 의지, 그리고 행동의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 이 구절을 좀더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듯, 다른 사람들 역시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즉 각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존재이듯,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복된 존재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28절 상반절). 아담 한 사람에게만 축복하신 게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눈이.
나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우리 안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시발점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취인 자신에 대한 생각은 삶의 질을 결정 짓습니다. 만약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인생은 즉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본래 선하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그것을 만듭니다.”
지금 어디에 있든지, 과거에 무엇을 했던지 아니면 하지 못했던지 간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임을 인정하고서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우리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자신에 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조언을 나눌까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히 선하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큰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 모두는 각별합니다.
둘째,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로 중요한 존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중요합니다. 나의 나 됨이 내 자신에게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실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태어난 날은 그들의 삶에 실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자라면서 우리가 했던 모든 행동이 그들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족과 다른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교회와 직장과 지역사회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노라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무척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느끼고 행동한 대로 그들에게는 현실이 됩니다.
셋째, 소원하는 대로 환경을 또한 주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능력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특별한 목적 가운데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멋진 일을 할 수 있도록 축복 받았습니다.
넷째, 우리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맡겨졌습니다. 곧 행복해지고, 일을 성취하며, 뜻을 높여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겠다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는 의심과 두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친히 빚으신 축복된 존재로서 이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이상적인 삶을 추구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그려보길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하고, 평화롭고, 즐거우며, 흥분으로 넘쳐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고 생각해 보십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매일 아침 일어나 하루하루를 열심히 시작할 것입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을 것이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하는 일이 즐겁고, 사회에 조그마한 긍정적 변화이나마 줄 수 있는 삶에 만족을 느낍니다.
부분부분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삶의 어느 영역에서 불행하거나 불만족스럽게 느낀다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혹은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두꺼비 안에 갇혀 있는 잘 생긴 왕자를, 즉 부정적 사고나 그릇된 믿음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멋진 왕자가 풀려날 수 있도록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겠다고 지금 결단하십시오.

Friday, August 16, 2019

비트겐슈타인의 자




비트겐슈타인의 자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 전도활동 중 평소처럼 어느 날 호숫가에 앉아 몰려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날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는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그리고 누룩 비유”( 13).
그런데 비유(parable)”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을 곰곰이 씹으면 씹을수록 안에 숨겨 있는 진리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표면상으론 무리가 듣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의 비유를 단순히 재미난 이야기로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안에는 실로 놀라운 천국에 관한 복된 소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영생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신비로운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들을 귀가 열렸던 소수의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비유를 듣고서 안에 담긴 교훈을 알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궁금히 여긴 것은 왜 무리에게 예수께서 굳이 비유로만 말씀하시나?”였습니다. 그 궁금증에 예수께서 이런 화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3:11, 12). 더 나아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예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13:14, 15). 예수께서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쉽게 설명하면, 무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 자들은 2,000년 전 유대인들만이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편협적 수용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기 주관(主觀)에서 묶인 채 주변 사람들을 보고 판단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니 서로 간에 쉽게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는 자기 자신이 했으면서 괜히 남을 탓합니다. 결국 가뭄에 메말라 갈라진 논처럼 서로간의 관계가 쫙쫙 갈라져 있습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스킨 인 데 게임(Skin in the Games)란 책에 비트겐슈타인의 자란 표현이 있는데, 이 질문과 함께 소개됩니다. “탁자를 자로 재는 행위, 그게 탁자의 길이를 재는 행위일까? 아니면 자의 길이를 재는 행위일까?”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기보단 있는 그대로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가 사라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나와 너가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함께 하길 거부하기보단 힘들긴 해도 자기 중심적 사고를 내려놓고 각자의 다름을 솔직히 인정하며 애써 손잡고 걸어가야 할 여정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서 손을 뿌리치진 맙시다.


2019. 8. 18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주일성경공부화요성경공부8월 첫 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더욱 많은 성도들의 적극적 동참 바랍니다.

3. 남선교회 헌신예배가 다음주일(825) 2부예배 때에 있습니다. 기도로써 준비바랍니다.

4. 주일학교 예배시간9월부터 오전 10:10-11:10으로 변경됩니다.

5. 주일학교에서 펼치고 있는 빈민들을 위한 잔돈 모으기(Shape the Love)”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6. 2019년 서부지역 평신도 지도자 수련회회복(Restoration)”(강사: 이덕주 목사, 정희수 감독)이란 주제를 가지고, 819-22일에 레익타호 Zephyr Point Conference Center에서 열립니다.

7. 목회사역 오리엔테이션Aldersgate UMC of Tustin에서 824일 오전 10-오후 3시까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8.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적극적 동참을 바랍니다.

9. 헌화 및 1/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지원서에 Sign Up 바랍니다.

10.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Friday, August 9, 2019

두려움을 용기로




두려움을 용기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하여 작은 일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난중일기 亂中日記 중에서)
이것은 1597 8 27-9 16일에 치른 명량해전(鳴梁海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장수들을 모아 놓고 간곡히 일러준 훈령입니다.
조선 수군에겐 몇 척의 함선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300 이상의 함선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면서 수군을 버리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장계를 받았건만 이순신 장군은 결단코 거부합니다.
역사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시피, 1597년 왜군의 2차 침입 후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160척 중 148척이나 침몰 당한 수모와 패배를 겪습니다. 그런 상황에선 왜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습니다. 승리 가능성이 단 1%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미 파괴되고 수몰 당한 배들이 아닌 아직 남아 있는 배들을 직시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12척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치른 첫 전투가 명량해전입니다. 거의 모든 것을 잃고서 치르게 된 전투인 셈입니다. 역적으로 몰려 받은 심한 고문으로 육신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수군은 칠천량의 패전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어머니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숱한 악재 속에서도 오히려 그가 장수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의 무서운 용기로 나타날 것이다”(영화 명량에서). 바로 그 용기가 23 23승이란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승전기록을 그에게 안겨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걱정, 실패의 상상력이 불러온 수치와 공포심. 그런데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중요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코자 몸과 마음이 스스로 알아서 준비 중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삶의 아름다움은 두려움 속에서 단단히 여물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당당히 마주하는 삶의 적극적 자세입니다.
금주 목요일은 일본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74주년째 광복절(光復節)입니다. 요즘 일본의 경제, 정치적 압박이 거세긴 하나, 우리 조국이 현실을 두려워하기보단 두려움을 오히려 용기로 승화시켰으면 싶습니다. 건너편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두려움의 장벽을 스스로 넘어서야 합니다.



2019. 8. 11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신 정춘욱 목사님(1부)과 안근조 목사님(2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 주일성경공부와 화요성경공부가 8월 첫 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더욱 많은 성도들의 적극적 동참 바랍니다.

4. 정기임원회가 오늘 2부예배 친교 후 AV Room에서 있습니다. 

5. 남선교회 헌신예배가 8월 25일 2부예배 때에 있습니다. 기도로써 준비바랍니다.

6. 2019년 서부지역 평신도 지도자 수련회가 “회복(Restoration)”(강사: 이덕주 목사, 정희수 감독)이란 주제를 가지고, 8월 19-22일에 레익타호 Zephyr Point Conference Center에서 열립니다.

7. 목회사역 오리엔테이션이 Aldersgate UMC of Tustin에서 8월 24일 오전 10시-오후 3시까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연락바랍니다.

8. Food Pantry, Prayer Shawls, Hats for Cancer Patients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적극적 동참을 바랍니다. 

9. 헌화 및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지원서에 Sign Up 바랍니다.

10.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August 6, 2019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고후 2:12-17 (2019 8 4일 주일예배)
사도 바울이 드로아 항구도시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방문, 즉 그의 두 번째 선교여행 때와는 달리 전도의 문이 쉽게 열려 이곳 저곳을 돌며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할 수 있었습니다. 순조로운 전도활동이 가능케 했던 연유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12). 곧 주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일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디도와 만남을 갖지 못해 사도 바울의 마음이 무척 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13절 상반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참고로, 바울에게 디도는 믿음의 아들이자 신뢰할만한 선교 동역자였습니다. 선교여정에서 마치 디모데처럼 매우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를 힘써 돌보던 디도에게 서둘러 드로아로 건너와 그곳에서 만남을 갖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분쟁 많던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교회형편을 디도로부터 직접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계획보다 일찍 그 도시에 도착했던 것인지, 아니면 사정상 디도가 늦게 왔는진 알 수 없지만, 끝내 그 둘은 그곳에서 만남을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드로아에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사도 바울은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서 마게도냐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마게도냐로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반스 (Barnes) 성경주석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첫째,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게도냐로 건너온 디도가 바울을 찾아 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바울의 권면이 받아들여졌다는 반가운 소식을 디도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눈물로 적었던 그의 조언에 고린도교회가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마게도냐 선교가 성공적일 것이란 강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 바울은 모처럼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그 결과 그가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 드린 조건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감사조건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14). 온갖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이곳 저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향기)를 드러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좋은 향기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곳 저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술과 삶을 통해 전해지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의 믿음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향기를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가능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 모두에게 바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고 쓰러지기보단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처한 환경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들 앞에서나. 죄악 가운데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 앞에서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15).
아무리 값이 비싸고 좋은 향수일지라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썩고 맙니다. 좋은 향기를 품었다 해도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썩은 냄새만 풍겨낼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가면, 요단 강 남쪽 끝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호수이자 강입니다.
길이는 47마일, 폭은 10마일, 해발 1,292피트입니다. 요단 강에서 매일마다 오백만 톤의 물이 유입됩니다. 그러나 아래에 위치한 계곡으로 물을 흘러 보내지 않기에 그곳은 건조한 사막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곳 물은 바다보다 무려 다섯 배나 수분 농도가 강하고, 쓴 맛이 나며, 어떤 곳은 기름기가 섞여 있습니다. 그 물엔 어떤 물고기도 살지 않고, 그 기슭엔 꽃도 피지 않으며, 과일도 자라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새도 그 주변에서 노래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 주변 모두 하나님의 저주가 덮친 것처럼 황폐하고 우울한 기분을 자아낼 뿐입니다. 오직 죽음만 연상됩니다. 그래서 그곳을 죽은 바다”, 사해(死海)”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좋은 것을 받고서도 정작 아무 것도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역시 사해, 즉 죽은 바다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냄새가 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있습니다. 삶의 냄새도 있습니다. 물론 셋째 냄새가 가장 중요하겠지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16).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냄새가 나는 것일까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 아니면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17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첫째,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한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어 받아들이고, 입술로 외치며, 삶으로 말씀을 실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이나 세상 철학, 윤리, 도덕과 혼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은 아니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둘째 아들 현우가 하와이에 전도여행 갔다가 코나 커피 두 봉지를 사왔습니다. 100% 코나 커피라고 강조하더군요. 물론 코나 커피 향을 재대로 즐기고 싶다면, 그것을 다른 커피와 섞어선 아니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에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 열심히 동참해야 합니다.
어느 정원에 향기 나는 항아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평범한 흙으로 만들어진 항아리였습니다. 하지만 정원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이상하게도 그 항아리에서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식물들이 그 항아리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좋은 향기를 만들어내니?” 그때 그 항아리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전에 무척 좋은 향기를 내는 카사블랑카 백합과 가까이 있었거든.”
사실 우리가 뿜어내는 향기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린 그 향기를 말로써, 삶으로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발티모어의 외과 의사이자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하워드 켈리 박사는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면, 양복 옷깃에 싱싱하고 아름다운 장미 한 송이를 꽂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장미는 하루 종일을 시들지 않고 싱싱함을 유지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비밀을 묻자, 그가 옷깃을 들추어 그 비밀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물이 담긴 작은 병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늘 싱싱할 것입니다. 뿜어내는 삶의 향기도 변질되지 않고 항상 신선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향기 나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생수를 날마다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향기 나게 커피 잘 뽑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녹차 잘 우려내기는 더 어렵다. 차 향내를 밝히면서도 사람 향내는 풍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찻잎이 그렇듯이 사람도 자라면서 점점 타고난 향내를 잃어버리고 떫은 맛만 낸다. 향내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사람 냄새라도 풍기는 그런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강운구, 시간의 빛 중에서)
우리 각자에겐 향기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향기가 달라집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 현재 자신이 풍겨내는 향기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15, 16). 꽃의 향기처럼, 우리의 삶의 좋은 향기가 다른 이들을 우리에게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삶이 극한 도전입니까? 그런 환경에선 그리스도의 좋은 냄새를 발산하기 힘들다 하소연하십니까? 그렇다면 혹시 발칸산맥 장미 향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가장 향기로운 향은 발칸산맥에서 피는 장미에서 추출된다고 하겠죠? 그것도 밝은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 2시에. 그 어둔 시간에 장미가 가장 향기로운 향을 뿜어내기 때문이랍니다.
베개의 눈물을 적셔본 자가 삶의 아름다움을 압니다. 그런 삶이 풍겨내는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역경을 이겨내고 뿜어내는 삶의 향기가 진정 아름답습니다.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아멘?

Friday, August 2, 2019

하나님이 쓰시는 몽당연필




하나님이 쓰시는 몽당연필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향기를 품고 태어났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향기가 있는 것이다. 향기로운 사람, 함께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멀리 있으면 늘 그리운 사람,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나는 오늘도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위의 글은 세상 사람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세상을 보고 웃는다(청학동 훈장)란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가 만나고 싶다는 삶의 향기 나는 사람들 중 하나는 단연코 테레사 수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의 삶은 아름다운 향기 그 자체였으니까. 오죽헌 했으면, “테레사 효과란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참고로, “테레사 효과란 어떤 사람 옆에 가기만 해도, 멀리서 그를 바라보기만 해도, 아니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왠지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착해지는 것 같은 효과를 의미합니다. 물론 헌신적 봉사와 사랑 그리고 섬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테레사 수녀의 향기는 평소 그녀가 믿고 본받고자 힘썼던 예수의 향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테레사 수녀에 관한 이야기할 때면, 왠지 그녀의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사랑의 기쁨: 일상생활 지침서(The Joy in Loving: A Guide to Daily Living)란 책에 다음과 같이 실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작은 연필입니다. 그가 생각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가 글을 쓰도록 하십니다. 그가 모든 것을 하십니다. 때론 힘들기도 합니다. 나는 부러진 연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깎아 사용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은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하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6:45). 테레사 수녀처럼 우리 모두가 선한 것, 곧 좋은 향기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그런 향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좋은 말, 좋은 미소, 좋은 영향.... 물론 그런 좋은 향기를 지속적으로 발산하려면, 우리 안에 좋은 것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삶이 가득 들어 있어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의 삶을 존경했고, 그 삶을 본받으려 했던 이해인 수녀가 몽당연필이란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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