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18, 2018

육신을 입은 하나님





육신을 입은 하나님
요일 5:1-10 (2018년 12 16일 대강절 셋째 주일)
지난 주 영어회중 예배시간 중 어느 한 방문객이 문을 열고 들어와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예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후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이것저것을 꺼내어 의자 곁에 두느라 무척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분주한 몸동작이 멈춘 후엔 머리에 손을 얹더니 그가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곧바로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어렵지 않게 그가 무숙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해요.”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노라말하고서 그의 곁에 앉았습니다. 전에 우리교회 주차장에 오랫동안 거주하던 앤드류와는 사뭇 달리 그의 몸에선 별로 강한 악취가 풍겨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서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좀처럼 핵심을 짚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말로 화제를 바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하물며 지금껏 그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나 종교기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가식적이고, 자신을 배척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어떤 교회에선 그가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내어 쫓아내려 한다고 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그의 문제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어주지 않기에 무척 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손을 꼬옥 잡고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점심이라도 사 드시도록 그의 손에 얼마의 돈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친교실로 모셔다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커피와 간식거리를 챙겨주었습니다. 물론 친교실에서도 한동안 곁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한어회중 예배가 있는 관계로 영어회중 한 분에게 그를 부탁 드리고서 그와 헤어졌습니다.
한어회중 예배가 끝난 후 여기저기 남겨진 그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에 빗자루와 쓰레기받이를 가져다 깨끗이 치웠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흔적을 치우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데이빗이 참으로 불쌍하기만 하다. 누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을까? 그가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나와 데이빗 사이가 너무 멀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내가 그를 가슴으로 온전히 동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대강절에 데이빗이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합니다. 아니, 주께서 데이빗을 만나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데이빗이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데이빗이 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6장에 보노라면, 헤롯 왕에 의해 세례 요한이 목 베임 당한 후 예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세례 요한의 순교로 인한 복잡한 머리를 식히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그곳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곳까지 좇아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리 그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잠시나마 쉬고 싶었던 예수님의 마음조차도 좀처럼 헤아려주지 못한 우매한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큰 무리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다른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4:14).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당시 분위기에서 예수께서 그 무리와 함께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예수께로 자꾸만 나아왔습니다. 왜 예수께서 그들에게 제발 잠시라도 쉴 수 있도록 내버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오히려 마음을 돌이켜 그들과 하루 종일 함께 하기로 하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더라.”
헬라어로 긍휼혹은 불쌍히 여김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의료 전문업계 혹은 내장학(內臟學)을 전공하지 않고선 깊게 이해하기 힘든 용어입니다. 어찌 하여튼 간에, 내장학은 교감신경조직과 관련된 학문입니다. 현대 용어로는, 소화기관에 관련된 학문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겼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그들을 단순히 가엾게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내장 깊숙이 예수께서 그들의 아픔을 느꼈다고 마태는 적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절름발이의 절뚝거림을 느꼈다.
• 그는 병든 자의 상처를 느꼈다.
• 그는 나병 환자의 외로움을 느꼈다.
• 그는 죄인들의 절망감을 느꼈다.
그들의 아픔이 강하게 느껴오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고쳐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가슴 절절히 느껴졌기에. 그들의 필요를 아셨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필요마저 잊고 말았습니다. 무리의 아픔을 느꼈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픔조차 뒤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슬프고 피곤해서 제자들과 홀로 지내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리를 그냥 돌아가도록 부탁했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그가 그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일로 너무 힘들어 할 때, 예수께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나 잘 이해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그토록 잘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후 우리가 느낀 것을 그대로 그 역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4, 15)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이유는 그가 인간이 되어 온 인류를 위해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으로서, 그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 되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은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은 죽을 수 없으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2:13-15).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사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죄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정죄를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깨끗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3).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합니다. 정녕 깨끗케 되었습니다. 정녕 그러합니다. 아멘.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일 5:5-9)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십니다. 우리의 구주시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임하셨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에게 소중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그가 우리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들어할 때, 그가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망할 때, 그가 응답합니다. 우리가 질문할 때, 그가 듣고 계십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이란 책에서 맥스 루카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번역해서 그대로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죽은 자에게 선포하셨던 그 혀는 인간의 혀였습니다. 문둥병자를 만졌던 그 손은 손톱 안에 떼가 낀 손이었습니다. 여인이 붙잡고 울었던 그 발은 딱딱하고 흙이 뭍은 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 . . 그 눈물을 결코 잊어선 아니 되는데. . . 그 눈물은 여러분과 나의 마음이 찢기고 깨어질 때 흘렸던 바로 그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에게로 나아왔던가요! 그들은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은 그를 만졌습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그를 좇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했고, 자기 아이들을 그의 무릎에 앉혔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성당의 동상이나 높은 강대상의 사제가 되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인간 예수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길 두려워 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를 모욕하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오해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를 존경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에 그가 너무 거룩하다거나, 너무 신적이거나, 너무 먼 존재라고 생각했던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부 당할 두려움 때문에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길 주저했던 자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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