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5, 2018

Christmas 2018

Christmas 2018
















Friday, December 21, 2018

2018. 12. 23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성가대에서 열심히 준비한 은혜로운 칸타타가 있습니다. 성가대에 감사드립니다. 예배 후 여선교회에서 준비한 성탄만찬이 있습니다.

3. 성탄전야예배는 내일(24일) 저녁 오후 7시에 영어회중 및 주변 이웃과 더불어 주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석바랍니다.

4. 금주 수요일(26일)과 내주 수요일(1월 2일)에는 수요예배가 없습니다.

5. 속장/인도자모임이 다음주일(30일) 2부 친교 후에 있습니다.

6. 송구영신의 밤 예배가 12월 31일(월) 저녁 오후 11시부터 있습니다. 성전은 오후 10시부터 열려 있으니 한 해를 마감하는 마음의 준비 및 새해 결단을 위한 기도시간을 미리 갖기 바랍니다.

7. 신년예배가 2018년 1월 6일(주일)에 있고, 2부예배 때 신년 임원 임직식도 있습니다.

8. 2019년 교회 지도자 세미나 및 임원 세미나가 1월 12일 오전 9시-정오까지 교육관에서 있습니다. 

9. 교회창립 39주년 기념예배가 2019년 1월 27일(주일)에 있습니다. 1, 2부 합동으로 예배합니다.

10.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9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11.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 최문자 권사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누군가의 산타 클로스가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누군가의 산타 클로스가 되어주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 목회칼럼은 “루돌프 사슴코” 동화와 캐롤 유래를 소개했다면오늘은 산타 클로스에 관해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기원 후 4세기경 오늘날 터키에 속한 지역 미라 시에 성 니콜라우스 주교(270-310)란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그런데 그는 남몰래 남들에게 선한 일을 자주 행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그 지역에 너무 가난한지라 결혼도 못한 세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니콜라우스 주교는 그들의 형편을 알고서 그들을 도와주자 했습니다그래서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지붕 위로 조용히 올라가 굴뚝으로 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떨어뜨렸습니다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자매들이 벽에 걸어두었던 양말 속으로 그 금이 들어갔다고 합니다물론 주머니 양말에서 뜻하지 않게 발견된 금을 팔아서 세 자매 모두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벽에 걸어둔 양말에 뜻하지 않게 금이 들어 있는 기적을 들은 사람들은 굴뚝에 양말을 걸어두는 풍습을 이어갔습니다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 신비한 자선가가 굴뚝을 통해 찾아온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니콜라우스 주교 사후에도 그의 선행 이야기는 노르만 민족에 의해 유럽으로 널리 전해졌습니다특별히 12세기 초기엔 프랑스 수녀들이 니콜라우스 축일 전날인 12 5일에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계속 이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했고그 훈훈한 풍속은 유럽 전역으로 계속 확산되었습니다더 나아가, 17세기에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달란드 사람들은 자선을 베푸는 자들을 “성 니콜라우스”라고 부른 대신 “산테 클라스”라고 불렀고영어 발음 때문에 “산타 클로스”로 바뀌었습니다.
니콜라우스 주교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구원의 기쁨을 타인에게 전했던 훌륭한 사제였습니다특별히 그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섬기면서 수많은 이들에게 성탄의 기쁜소식을 나누었습니다
성탄은 기쁨을 나누는 계절입니다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곧 구원자로 우리에게로 다가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그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계절입니다특별히 가난하고외로운 이들에게 우리가 받은 주 예수의 탄생의 기쁨과 감격을 전하려 힘쓰는 계절입니다물론 기쁨과 감격을 나누는 방법 중 하나가 조그마한 선물이나마 정성스럽게 준비해 전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익히 잘 알다시피기쁨과 감사는 나누면 나눌수록 커져갑니다.
구세주의 탄생이 기뻐할 만하고 감사할 만한 축복이라면우리가 받은 기쁨과 감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노력은 지극히 당연합니다성탄의 계절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인 주 예수의 탄생 때문이고그와 동시에 경험한 기쁨을 그 누군가와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금년 성탄절에 그 누군가에게 신비스런 산타 클로스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물론 니콜라우스 주교처럼 굳이 자신의 선행을 알릴 필요까진 없을 것입니다.




Tuesday, December 18, 2018

육신을 입은 하나님





육신을 입은 하나님
요일 5:1-10 (2018년 12 16일 대강절 셋째 주일)
지난 주 영어회중 예배시간 중 어느 한 방문객이 문을 열고 들어와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예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후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이것저것을 꺼내어 의자 곁에 두느라 무척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분주한 몸동작이 멈춘 후엔 머리에 손을 얹더니 그가 무척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곧바로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어렵지 않게 그가 무숙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해요.”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노라말하고서 그의 곁에 앉았습니다. 전에 우리교회 주차장에 오랫동안 거주하던 앤드류와는 사뭇 달리 그의 몸에선 별로 강한 악취가 풍겨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서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좀처럼 핵심을 짚을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말로 화제를 바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하물며 지금껏 그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나 종교기관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가식적이고, 자신을 배척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어떤 교회에선 그가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내어 쫓아내려 한다고 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그의 문제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어주지 않기에 무척 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손을 꼬옥 잡고서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점심이라도 사 드시도록 그의 손에 얼마의 돈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친교실로 모셔다 그곳에 준비되어 있는 커피와 간식거리를 챙겨주었습니다. 물론 친교실에서도 한동안 곁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한어회중 예배가 있는 관계로 영어회중 한 분에게 그를 부탁 드리고서 그와 헤어졌습니다.
한어회중 예배가 끝난 후 여기저기 남겨진 그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에 빗자루와 쓰레기받이를 가져다 깨끗이 치웠습니다.
그가 남겨놓은 흔적을 치우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데이빗이 참으로 불쌍하기만 하다. 누가 그의 마음을 온전히 위로할 수 있을까? 그가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나와 데이빗 사이가 너무 멀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내가 그를 가슴으로 온전히 동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대강절에 데이빗이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합니다. 아니, 주께서 데이빗을 만나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데이빗이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데이빗이 새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6장에 보노라면, 헤롯 왕에 의해 세례 요한이 목 베임 당한 후 예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세례 요한의 순교로 인한 복잡한 머리를 식히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그곳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곳까지 좇아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리 그 장소에 도착해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잠시나마 쉬고 싶었던 예수님의 마음조차도 좀처럼 헤아려주지 못한 우매한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큰 무리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다른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4:14).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당시 분위기에서 예수께서 그 무리와 함께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예수께로 자꾸만 나아왔습니다. 왜 예수께서 그들에게 제발 잠시라도 쉴 수 있도록 내버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오히려 마음을 돌이켜 그들과 하루 종일 함께 하기로 하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더라.”
헬라어로 긍휼혹은 불쌍히 여김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이것은 의료 전문업계 혹은 내장학(內臟學)을 전공하지 않고선 깊게 이해하기 힘든 용어입니다. 어찌 하여튼 간에, 내장학은 교감신경조직과 관련된 학문입니다. 현대 용어로는, 소화기관에 관련된 학문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께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겼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 그들을 단순히 가엾게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내장 깊숙이 예수께서 그들의 아픔을 느꼈다고 마태는 적고 있는 것입니다.
• 그는 절름발이의 절뚝거림을 느꼈다.
• 그는 병든 자의 상처를 느꼈다.
• 그는 나병 환자의 외로움을 느꼈다.
• 그는 죄인들의 절망감을 느꼈다.
그들의 아픔이 강하게 느껴오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고쳐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가슴 절절히 느껴졌기에. 그들의 필요를 아셨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필요마저 잊고 말았습니다. 무리의 아픔을 느꼈기에, 예수께서는 자신의 아픔조차 뒤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슬프고 피곤해서 제자들과 홀로 지내길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무리를 그냥 돌아가도록 부탁했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그가 그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일로 너무 힘들어 할 때, 예수께서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나 잘 이해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그토록 잘 알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후 우리가 느낀 것을 그대로 그 역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14, 15)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이유는 그가 인간이 되어 온 인류를 위해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으로서, 그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이 되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은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은 죽을 수 없으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2:13-15).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사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죄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정죄를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깨끗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3).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합니다. 정녕 깨끗케 되었습니다. 정녕 그러합니다. 아멘.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요일 5:5-9)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십니다. 우리의 구주시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임하셨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에게 소중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그가 우리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들어할 때, 그가 듣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망할 때, 그가 응답합니다. 우리가 질문할 때, 그가 듣고 계십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이란 책에서 맥스 루카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번역해서 그대로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죽은 자에게 선포하셨던 그 혀는 인간의 혀였습니다. 문둥병자를 만졌던 그 손은 손톱 안에 떼가 낀 손이었습니다. 여인이 붙잡고 울었던 그 발은 딱딱하고 흙이 뭍은 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물. . . 그 눈물을 결코 잊어선 아니 되는데. . . 그 눈물은 여러분과 나의 마음이 찢기고 깨어질 때 흘렸던 바로 그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에게로 나아왔던가요! 그들은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은 그를 만졌습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그를 좇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했고, 자기 아이들을 그의 무릎에 앉혔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성당의 동상이나 높은 강대상의 사제가 되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있는,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인간 예수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길 두려워 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를 모욕하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오해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를 존경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손으로 만지기에 그가 너무 거룩하다거나, 너무 신적이거나, 너무 먼 존재라고 생각했던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부 당할 두려움 때문에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길 주저했던 자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요한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아멘.

Friday, December 14, 2018

루돌프 사슴코




루돌프 사슴코
요즘 들어 길거리에서 운전하고 다니노라면, 루돌프 사슴코 장식을 한 차들과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차의 앞 창문엔 사슴의 뿔을 달고, 차 앞엔 빨간색 코를 매달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장식은 루돌프 사슴코동화에 등장한 빨간색 코를 가진 사슴 루돌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들이 루돌프 사슴코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서 그 장식을 하고 다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돌프 사슴코 이야기 탄생 배경은 이러합니다.
1938년 연말연시를 맞이했을 무렵 밥 메이(Robert L. May)란 사람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습니다. 34살의 밥 메이는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 백화점 홍보 기사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광고 카피라이터였던 셈입니다. 그의 키는 유난히 작았고, 체구도 말라빠졌기에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 에블린(Evelyn)2년 동안이나 암과 투병 중이었습니다.
자신과 아내가 가난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참아낼 수 있었지만, 네 살짜리 어린 딸 바바라(Barbara)가 친구들의 놀림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싶지 않았습니다. “너의 엄마는 늘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지?”라고 친구들이 놀려댈 때마다 딸은 울며 집으로 돌아왔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왜 내 엄마는 다른 애들의 엄마처럼 될 순 없죠?” 딸의 질문을 받고 밥은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를 떠올렸습니다. 키가 작고 메마른 그를 친구들이 놀려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밥은 딸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것이고, 누구나 소중한 가치와 함께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담은 동화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루돌프 사슴코입니다. 물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동화였으나 루돌프라는 이름을 넣어 자기 자서전적 이야기로 각색했던 것입니다.
그 해 12월 엄마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밥의 딸 에블린은 루돌프 사슴코 이야기 때문에 큰 위로와 희망을 찾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후 그 동화는 루돌프 그 빨간색 코 사슴 (Rudolph the Red Nosed Reindeer)이란 책으로 출간되어 6년 만에 무려 6백만 부가 팔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루돌프 사슴코란 제목으로 성탄 캐롤까지 만들어져 밥과 그의 딸에게 큰 부와 명예까지 안겨주었습니다.
유난히 코가 빨개서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해 슬퍼하던 루돌프에게 어느 날 싼타가 찾아와 그의 빛난 빨간색 코가 어두운 밤을 밝히는데 필요하겠다면서 썰매를 끌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부터 루돌프는 외톨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Tuesday, December 11, 2018

Advent Dinner 2018

Advent Dinner 2018

















구유에 들어 있는 표적




구유에 들어 있는 표적
2:1-7/20 (2018 129. 대강절 둘째 주일예배)
오늘 읽었던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황제 아구스도가 내린 칙령에 따라 로마제국 내에 식민지 백성은 누구나 호적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호적을 등록하러 모두가 각자 고향을 찾게 되었고, 나사렛에서 거주하던 요셉도 자기 약혼자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임신 중이었는데,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땐 곧 아기를 출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호적 등록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여행 중이었기에 베들레헴에서 빈 여관방을 찾는 게 극도로 힘들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갓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방을 구하려 힘썼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그는 여관 주인에게 통사정해 마구간이나마 쉴 공간으로 간신히 얻었습니다.
어렵게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마구간에서. 짐승들이 쉬는 공간에서.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자, 마리아는 그를 포대기로 잘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첫날 밤을 말구유에 누워서 지내야 했던 아기를 생각해 봅니다. 그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싶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그 아이가 누구입니까? 몇 달 전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사렛에서 마리아게 찾아와 이렇게 일러주지 않았습니까?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1:30-33).
천사장 가브리엘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아이는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아닙니까?  곧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격에 맞는 곳에서 그가 태어났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천사장 가브리엘의 말이 맞다면, 마리아는 큰 영광을 얻은 셈입니다. 자신의 비천한 몸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왕들이 아들을 얻게 될 때, 얼마나 호들갑을 떱니까?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것이 얼마나 경사스런 사건입니까? 그런데 그토록 고귀한 이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지극히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방을 구하지 못해 여관 마구간에서 첫아기를 낳았을 때, 한 어미로서 마리아의 실망이 이만 저만 큰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말구유에 짚을 깔고 그곳에 갓 낳은 아들을 눕혀야 했을 때, 어머니로서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마리아가 이런 생각도 해보았으리라 믿습니다. “도대체 남편 요셉의 가족과 친척은 모두 어디에 있나? 그들도 호구 조사를 위해 이곳 베들레헴으로 오지 않았겠나?”
그런데 혹시 요셉의 가족이나 친척으로부터 마리아가 환영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론 우리는 그 당시 요셉의 가족이나 친척의 상황을 잘 모릅니다. 성경이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기에.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를 낳으면, 가족과 친족의 지극한 축하를 받고서 산모는 지친 몸에 쉼을 얻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을 때, 그녀의 가족이나 요셉의 가족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지친 몸도 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피곤한 몸을 일으켜 낳은 아들을 포대기로 잘 감쌌습니다. 구유, 곧 짐승의 여물통을 잘 닦은 후 그 안에 짚을 넣고 아기를 눕힌 후에야 비로소 잠시나마 바닥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구유에 눕힐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그곳에 아이를 눕히길 주저하진 않았을까요? 짐승의 여물통에 갓 태어난 아기를 눕힐 때 불안하진 않았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짐승의 밥통이었기에? 만약 마구간의 짐승들이 그 여물통에 든 아기를 자신들의 음식으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면?    
짐승의 여물통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지켜보면서,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이런 생각도 가졌으리라 봅니다. “이 아이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긴 하나?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님께 계획하신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내 삶을 흔들어 놓으신 것인가? 왜 하나님은 평범한 가정을 꾸려 성실히 살아가려던 요셉과 나의 삶에 들어와 모든 것을 이토록 엉망으로 몰아가는가? , 하나님? , 하나님?”
성도 여러분, 혹시 마리아의 심적 갈등이 여러분에게도 익숙하진 않나요?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곤 하지 않나요? 특별히 계획하던 대로 삶이 진행되기보단 자꾸만 일이 꼬여갈 때. . . 
마리아의 갈등이 깊어져 갈 때, 목자들이 마구간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들을 보고서 마리아는 더욱 기겁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복잡한데, 난생 처음 본 자들이 마구간에 급습했으니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들은 또 뭐야?”란 생각이 절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목자들이 구유에 포대기에 싸여 누어 있는 아기를 보고서 그 아기에 관해 천사가 들려준 말을 마리아에게 일러줍니다. 바로 그 순간 마리아의 갈등이 멈추었습니다. 아니 갈등이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척 흥분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목자들로부터 마리아가 어떤 말을 들었기에, 그녀의 갈등이 순간적으로 멈추었을까요? 그 해답을 10-1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오늘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온 세상의 구주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표적이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건대, 태어난 아이가 구유에 누어 있는 것은 결코 불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던 마리아나 요셉에도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유에 누인 아기가 하나님께서 제시한 표적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본 그 아기가 온 세상의 구주, 곧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아기가 구유에 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다른 곳에 누어 있었더라면, 만약 그가 화려한 왕궁의 포근한 침대에 누어 있었더라면, 그 아이는 결코 온 세상의 구주, 곧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표적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어야 했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를 보고서 목자들은 너무나 흥분했습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께서 탄생하신 것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기쁨과 흥분 가운데 목자들은 들에서 들었던 천군천사의 찬양을 흥얼거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4).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는 목자들에게만 표적이 아니라 이젠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리아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실로 엄청난 표적 그 자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있는 자신의 아기를 보고서 마리아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뻤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들이 말했던 그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마리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한 표적이기도 했습니다. 곧 나와 여러분을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우리의 구주, 곧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고, 그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어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주 탄생을 알리는 표적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마구간 여물통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척 쉬웠습니다. 마구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쇠로 만들어진 문이나 빗장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곳을 지키는 군병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활짝 열려 있는 마구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표적을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표적의 아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곧 여러분과 나에게도.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이들이 엉뚱한 데서 찾아오신 구주를 찾는 경향이 많습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삶을 살아가면서 삶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있다는 확신을 갖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길 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표적을 원합니다.
많은 경우 계획한 모든 게 뜻대로 진행된다면, 확신을 갖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제자리에서 잘 운행되고 있다면, 그제야 마음을 놓습니다. 하지만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곧 실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요?   
만약 우리가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큰 교훈을 찾아낼 수 있길 바랍니다. 때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론 우리가 계획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성공을 원하지만, 실패로 끝나기도 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려 힘쓰나, 오히려 아주 낮은 곳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시간에 묵묵히 되새김질 해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있는 그 절망스런 장소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표적의 장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표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짐승의 여물통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 표적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시때때로 우리의 꿈과 계획이 산산조각처럼 부셔져 버리곤 합니다. 더 이상 떨어질 수가 없을 정도로 낮은 처지로 몰리곤 합니다. 친한 친구들마저 등을 돌렸기에 한없이 외롭습니다. 가족과 친척들마저 외면합니다. 그런 상황으로 몰리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 보입니다. 실패한 인생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이야말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최적의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이 우리가 찾아야 할 바로 그 표적의 구유일 수 있습니다.
성도들께서 내 말을 오해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결코 꿈과 계획의 실패를 포장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외로움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의 구주께서는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가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다시 일어서도록 새 힘을 불어넣어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000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에서처럼 우리 생의 가장 쓰라린 아픔, 가장 처절한 굴욕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궁극적으로 그곳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11, 12).  즉시 목자들은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가야 했습니다. 서둘러 그곳으로 찾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표적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달려갔습니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6, 17).
성도 여러분, 금번 대강절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찾아와 우리를 만나주시는 구주를 뵈옵고,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가 만난 그 주님을 기쁨과 환희 가운데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천군천사들처럼 우리 역시 이렇게 찬양하길 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14).

God’s Sign in A Manger



God’s Sign in A Manger
LK 2:1-7/20 (December 9, 2018)
The text we read today is the story of Jesus' birth.
Caesar Augustus issued a decree that a census should be taken of the entire Roman world, so all people in the Empire had to go to their own hometown and register their families. Therefore, Joseph, who lived in Nazareth, brought his fiancé Mary with him to Bethlehem.
Mary was pregnant, and when arriving in Bethlehem, she was about to give birth to a child. But there was a big problem. It was extremely difficult to find a room in Bethlehem, because so many people were traveling for family registration. Joseph tried to save a room for Mary and the child to be born, but all his effort was in vain. In the end, he found a space in a stable attached to the inn and took Mary there to rest.
In difficulty, Mary gave birth to a son in a stable where the animals were resting. And as the boy was born, Mary wrapped him in cloths and laid him in a manger.
As soon as the child was born, he was put in a manger to spend his first night there. As thinking of his first night in a manger, I feel like the baby’s fate looked so unfortunate.
But who is the new born child? A few months ago, did not Gabriel the archangel from God come to Mary and tell her like this? “Do not be afraid, Mary,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 You will be with child and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The Lord God will give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his kingdom will never end” (LK 1:30-33).   
According to Gabriel, the baby from Mary was a great feagure, the Son of the Most High. It means he was God’s Son. If so, he must have been born in the most elegant of surroundings.
On the other hand, if what Gabriel had told her was true, Mary had been given an incredible honor. It was because God’s Son would be born through her lowly body. How celebrating is it when a son is born to an earthly king? If so, how celebrating must it have been if it was about the birth of the Son of God, the Creator of the universe? But, instead, when the Son from the Most High was born, he made his appearance on earth in the lowliest of circumstances. 
So Mary must have felt disheartened as she couldn’t find a room, but had to give birth to her first son in the stable. When laying some straws in a manger instead of a soft cloths and placing her newborn baby there, she must have felt sorry to him as his mother. Don’t you think so?
I believe Mary had thought like this. “Where is Joseph’s family? Don’t they have come to Bethlehem for the census too?”
Perhaps Mary and Joseph were not welcome with the rest of his family. Of course, we don’t know about the real situations of Joseph’s family and relatives in those days because the Bible doesn’t mention about them.
In general, if a mother gives birth to a child, she would be surrounded by family and relatives and congratulated and rest all the day long. But Mary was all alone, exhausted but couldn’t rest after the delivery. Rather, she got up to clean and wrap her son with cloths and laid him down in a manger and then now she finally got rested for a moment.
I wonder what Mary had thought when putting her son in a manger. Wasn’t she hesitant to put him there? Wasn’t she afraid to put him there because it was the trough for animals to have their food? What if the animals came to it in search of food?
As watching her son sleeping in a manger, what did she think as his mother? Didn’t she wonder if the child was really God’s Son, if this was really what God had planned?” “Why did God send an angel and shook my life? Why did God come into my life and Joseph’s and make our lives so messy like this? What we want is simply to live a normal life and live happy?” “Why, God?” “Why, God?”
Dear brothers and sisters, isn’t Mary's inner conflict familiar to you? Aren’t you asking the similar questions to God so often? Especially when something that you planned don’t go well, and your life goes the opposite to what you had expected.
Mary's conflict deepened, as some shepherds rushed into the stable. Mary was frightened when she saw them coming in. The situation was a way too much for her to handle already, but to make things worse, so Mary got extremely terrified. She must have thought, “What are these gangs? Why are they here?”
The shepherds then told what the angel had spoken to them about the baby, after they had seen him wrapped in cloths and laid in a manger. Then not only was her dilemma stopped but also she became thrilled about what she heard from the shepherds.  
Then what did Mary hear from the shepherds, so that her inner conflict disappeared momentarily? The answer can be found in verses 10-12:
Do no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that will be for all the people.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This will be a sign to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 
The news was that “Today the Savior of the whole world has been born in Bethlehem, the town of David.” And the sign to it was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aid in a manger.
It is not unfortunate for the child to be laid in a manger. It was not too bad for Mary and Joseph to wrap their baby in cloths and lay him in a manger. The reason is that "the baby in the manger" was the very sign God wanted to give.
The shepherds knew it was the Christ-child because he was lying in a manger. If he had been lying in another place, if he had been resting in the cozy bed of the grand palace, he was never the Savior, the Christ of all. It was different from what God had told them. As the angel said, the baby, who came to be the Savior of the whole world, must have been wrapped in cloths, resting in a manger. It was the true sign from God for the shepherds.
Shepherds were excited as they saw a baby resting in a manger. Because they were witnessing the birth of the Savior of the world. So with great joy and excitement, they hoisted the praise that they had heard from the heavenly choir in the fields, singing: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s” (vs 14).
When the shepherds told Mary of their sign from God, it must have become an amazing confirmation of her as well. So when looking at her baby resting in a manger again, Mary was no longer depressed. She was no longer disappointed. She was no longer feeling sorry for the baby in a manger. Actually she was rather happy. It was for the reason that it was the very sign for the shepherds told by God. And it was the sign for Mary herself from God.
Of course it was also the very sign for the whole world. Therefore, it was the very sign for me and for you. Two thousand years ago, our Savior was born in Bethlehem, Judea, our Christ was born there, wrapped in cloths, resting in a manger his first night.
That’s right. The sign to the Christ-birth was not far away. It was in a manger. So it was very easy for everyone to come to the sign. The stable was open to anyone. It meant it was approachable and accessible to all. There were no gate bars to the sign. No solider was guarding. Widely open to all.  
What this means is that anyone who believes in the sign as God’s blessing to him can go forth to the sign-baby anytime. The road to the sign-baby was accessible to everyone. So it is the same to you and to me too.
Unfortunately, many people tend to find the Savior in the wrong places. What I am saying is this. We want to know we are in God’s will and plan. We want to know God is still with us. We want to know we are being used by God. We want confirmation. That’s why we often ask a sign from God.
We think confirmation of our decisions is that things go well as we had planned. We are relieved if they come into the right place. So we are disappointed if things don’t go well as we had planned. We think God doesn’t help us at all. But is it true?
If we are getting into this dilemma, I hope we can find some lessons from the text today. Sometimes things do not go well as the way we expect. Sometimes they flow contrary to what we plan. We want to be successful, but we end up in failure. We want to climb a high place, but rather we fall to a very low place.
That is exactly what we should consider at such a time. “What if the sign is that God is with us in our desolate place?”  “What if the sign that God is still with is in our lowliest point of life?” In other words, the confirmation for us is the manger itself.
Let me tell you this way. Oftentimes our dreams and plans are falling apart. Despite all our toils, we are falling into the lowliest point of life. Friends are leaving, so we get lonely. Even family and relatives are turning their backs on us. When we are at such a point of life, we think we are finished. We are nothing but a failure. But who knows that situation is exactly where God is with us. Who knows that situation is the manger, the very sign, for us from God?      
Brothers and sisters, please don’t misunderstand what I am telling you now. I never mean to beautify the failures of our dreams or plans. I never mean to say that it's okay for us to be neglected or ignored by people. What I want to say is this. In our failure, frustration and loneliness, our Savior is still with us. In such situations he gives us strength and comforts us, and gives us courage to stand up again.
That’s right. The manger in Bethlehem 2,000 years ago highlights the way God uses our deepest pain and our humiliation and turn it into the way he will be glorified. 
The angel told the shepherds,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This will be a sign to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 (vss 11, 12). The shepherds had to go to the stable in Bethlehem immediately. They had to go there and check the sign-baby. So they ran to the stable in Bethlehem without delay. “So they hurried off and found Mary and Joseph, and the baby, who was lying in the manger. When they had seen him, they spread the word concerning what had been told them about this child” (vss 16, 17).
Dear brothers and sisters, I hope that during this Advent season we can all meet the Savior who comes to our lowliest places and, in return, we can tell the people about the Lord we had met. And, like the heavenly choir, we will be able to praise like this: “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s” (vs 14).

Friday, December 7, 2018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을 회상하며
미국의 41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이 94세의 일기로 지난 11 30일 텍사스 휴스턴에서 이 땅에서의 순례를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엔 와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조문의례가 있었고, 수요일 오전엔 국립성당(National Cathedral)에서 추모예배가 열렸으며, 목요일 오전엔 부시 전 대통령이 평소 출석한 텍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성공회교회에서 마지막 추모예배가 열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과 그의 아내 바바라 여사에게 특별한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된 추모 일정 모두를 빠뜨리지 않고 시청했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의 삶을 회상할 있도록 매우 잘 짜인 순서순서였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특별히 국립성당과 성공회교회 추모예배 설교와 조문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를 기억하며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도록 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말했던 조종사들의 전문용어 시계 양호’(CAVU)”가 조문 가운데 언급되었을 땐, 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살아 생전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18~19살 태평양전쟁 조종사 시절 이륙 직전의 두려움 속에 완벽한 비행을 위해 내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시계 양호였습니다. 나는 이제 인생도 그와 같이 느낍니다. 바바라와 나는 더 좋은 삶을 바랄 수 없을 만큼 참으로 행복하고 평온합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존 미첨의 말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인생의 규범은 ‘진실을 말하고 남을 탓하지 말라. 굳건하게 최선을 다하고 용서하라, 끝까지 완주하라’이었습니다.” 그는 부시 전 대통령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좇아 삶을 살기 위해 힘쓰다 이 세상을 떠나간) 가장 미국적인 신념가”로 소개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삶의 본을 통해 보여준 그의 일화 역시 자주 언급되곤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보단 국민과 나라를 위해 최선이라고 믿었던 바를 성취하고자 묵묵히 길을 걷고서 떠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에겐 국립성당에서 열린 추모예배보단 휴스턴의 성공회교회 추모예배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예배 가운데 부시 전 대통령과 그의 아내 바바라 부시 여사가 살아생전에 즐겨 불렀던 찬송가들이 울러 퍼질 땐 참으로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도 후 온 회중이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Onward, Christian Soldiers)”란 찬양을 불렀는데, 그 찬양 역시 부시 전 대통령의 특별한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병으로서 충성스런 삶을 힘써 살다 가노라라고 부시 전 대통령이 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장지였던 부시 도시관(Bush Library)에서 편대를 이룬 군용기들이 날아오더니 그 중 한 대가 수직으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것은 승리자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감을 상징했습니다.



2018. 12. 9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대강절(Advent)이 지난 주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 영적순례에 기도로 함께 하시고, 제단장식용 포인세티아 기증 부탁드립니다.

3. 오늘 남선교회 총회가 교육관, 여선교회 총회가 본당에서 2부예배 후에 있습니다.

4. 한 해를 마감하는 정기임원회가 다음 주일(12월 16일) 2부예배 후에 AV Room에서 있습니다.

5. 화요성경공부: 12월 18일로 2018년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1월에 다시 개학합니다.

6. 성탄주일예배는 12월 23일 주일에 있습니다. 1부, 2부 그리고 주일학교가 함께 모여 합동 예배로 드립니다.
   ☑ 성탄주일에 예배에는 세례, 입교예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세례나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담임목사님께 연락 바랍니다.

7. 성탄전야예배가 12월 24일(월) 오후 8시에 있고 26일 수요예배는 쉽니다.

8. 송구영신의 밤 예배가 12월 31일 밤 11시에 교회에서 있습니다.

9.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9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10. 2019년도 달력을 안내석에서 받아가기 바랍니다.

Tuesday, December 4, 2018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5-35 (2018 12 2일 대강절 첫째 주일)
세상에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황금,’ ‘소금,’ ‘지금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감동을 먹은 남편이 아내에게 곧바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게 뭔지 맞춰 봐요.”
잠시 후 아내에게서 남편에게 답신이 날아왔습니다. “현금, 입금, 지금.”
그러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입금, 쪼금, 방금.”
오늘은 기다림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기다립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싶네요. “기다림이 멈춘 순간 우리네 삶의 시계도 멈춘다.” 죽은 자가 기다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건만, 왠지 우리는 기다림에 별로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현 시대엔 더욱 그리합니다. 아마도 컴퓨터와 휴대전화와 같은 현대문명이 가져다 준 부정적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현대문명이 우리 삶에 편의를 가져다 준 것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삶을 너무나 쉽고 빠르게 만들어준 긍정적 영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긍정적 영향 뒷면엔 부정적 영향 역시 만만치 않는데, 그 중 하나가 기다림의 덕까지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켰는데, 자동 업데이트가 걸렸을 때 우리는 짜증부터 냅니다. 와이파이가 잘 작동되지 않으면, 휴대폰이 느리다고 곧바로 짜증을 부립니다.
기다림의 덕을 상실한 채, 잠깐의 기다림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 시간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뉴스를 읽거나 게임을 합니다. 기다림의 덕과 능력까지 모조리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닌지. . .
그런데 있지 않습니까? 혹시 기다림이 멈춘 곳엔 좌절과 절망과 죽음만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독일이 유대인들을 심히 학대했을 당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기간에 사망자가 유난히 급격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용소 안에서 혹독한 노동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급작스럽게 퍼진 전염병 때문이었을까요? 놀랍게도 그 이유는 그들이 기다림을 포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새해가 되면, 풀려날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며 기다렸는데, 성탄절과 새해가 지났음에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의 희망의 줄마저 놓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림과 희망이 사라지자, 생체시계조차 멈추어버렸던 것입니다.
기다림은 프랑스어로 attente(아탕트)인데, 이것은 기다림뿐만 아니라 기대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기다린다는 것은 늘 기대를 동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대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으면, 기다림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리고 기다림을 포기하노라면, 삶을 살아갈 희망마저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신앙은 기다림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실 기다림을 제거해 버리면, 기독신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2:20, 21)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시자, 온 성도가 이렇게 화답한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금년 대강절(Advent)은 바로 오늘인 12 2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라틴어 어원 아드벤투스(adventus)를 따라 영어로 “Advent”라고 하는데, “오다, 임하다, 도래하다란 의미입니다. 이 기간에 누군가가 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강절은2000년 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신 그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는 교회력의 시작을 알리는 대강절에 들어섰습니다.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아도, 지나간 시간을 결코 되돌이킬 순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스럽다 해도 그것은 지나가버린 시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다가오는 시간에 쏠려야 합니다.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기대 혹은 설렘을 품은 기다림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력으로 2018년을 마무리 짓고 2019년을 맞이하게 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며 기다립니까? 누구를 고대하며 기다리십니까?
참고로, 대강절에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우리의 기다림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므온이란 인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25, 26)
한편으로, 시므온이 살아가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잡혀 갔던 유대인들 중 다수가 고국으로 되돌아왔지만 유대지역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속국 백성으로서의 삶은 강대국이 자행하는 끊임없는 약탈과 착취를 견디어야 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 페르시아나 로마로부터 독립을 꿈꾸고서 투쟁한 무리도 다수 있었으나 매번 실패로 끝났을 뿐이고, 실패할 때마다 억압과 핍박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에 위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위로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25).
그렇다면 시므온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임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1). 그리고 사 40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또한 사 42장에 보노라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
물론 사 42:1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내가 택한 사람이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온 인류가 기다려왔던 바로 그 메시아, 즉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넘어서야 할 갈등 중 하나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혹은 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입증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기다림 밖에는.
그런데 시므온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았고,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고서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기뻐하실 만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다음과 같은 희망의 약속을 들을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2:26). 아멘,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요즘 참으로 힘드시죠? 여전히 Thousand Oaks Border Bar의 총격사건과 바로 인근에서 거세게 타올랐던 산불의 후유증이 떠나가지 않고 있죠? 특히나 집을 나설 때마다 불타버린 집들과 검은 야산을 보아야만 하기에 마음이 여전히 심란하기만 하죠?
더 나아가서, 경제적 여건이 자꾸만 힘들어지고, 건강의 문제까지 생기고, 자녀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끊임없이 문제가 생기고. . .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위로가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로부터 위로를 찾고 있나요? 혹시 시므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위로를 기다려보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위로는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위로자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금번 대강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로부터 위로 받고, 새로운 삶을 희망차게 열나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위로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오늘 본문 25절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의 자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우울하고 희망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을 때, 시므온은 여전히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힘쓰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설령 다른 이들이 성경의 약속을 잊어버린 채 우울과 불안 가운데 체념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시므온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실 위로이신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바로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합니다.
금년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12, 즉 연말연시라고 해서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대강절에 시므온과 같은 자세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품고서 하루하루를 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사 우리를 위로해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대강절 순례 여정을 함께 걸어가길 바랍니다. 그리고 대강절 기간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특별히 금주 토요일 오후 6시에 열릴 대강절 맞이 만찬에 함께 하셔서 대강절 영적순례에 우리 모두가 함께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
대강절 계절이 다가올 때면, 이해인 수녀의다시 대림절에란 시()가 떠오릅니다. 이 시를 읽어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밝고 둥근 해님처럼
당신은 그렇게 오시렵니까

기다림밖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당신은 조용히 사랑의 태양으로 뜨시렵니까

. . . . .
어서 오십시오, 주님
우리는 아직 온전히 마음을 비우지는 못했으나
겸허한 갈망의 기다림 끝에
꼭 당신을 뵙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첫 기다림이며
마지막 기다림이신 주님
어서 오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대강절 기간 동안 주 예수의 은혜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있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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