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12, 2017

꺼내야 할 선물 (2): 평화



꺼내야 할 선물 (2): 평화
2:8-14; 2:14-16 (2017 12 10. 대강절 둘째 주일)
오늘 본문을 보노라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한 천사가 나타나 이런 소식을 들려줍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2).
그리고 나서 하늘에 수많은 천사들이 나타나더니 그 천사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하길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런 찬송을 불렀다고 하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하긴 우리 찬송가에 이 가사가 들어 있는 찬송도 있습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주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한 찬미 하기를
평강의 왕이 임하니
다 평안 하여라
그 분요하던 세상이
다 고요 하도다.

그런데 이 찬송을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정말 그러할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구세주가 태어난 것이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영광스런 사건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가 되는 사건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평화가 있긴 합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라고 천사들이 노래한 후 무려 2천년의 시간이 흘러갔건만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이곳 저곳에 폭력과 전쟁이 난무합니다.
평화. . . 도대체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와 나라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까운 벤츄라(Ventura), 산타 폴라(Santa Paula), 실마(Sylmar), 벨 에어(Bel Air), 그리고 기타 여러 곳에서 지난 주에 큰 산불이 일어나 막대한 재산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산타 아나 강풍이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로 산불이 순식간에 여러 곳으로 확산되고 말았지요. 방대한 지역의 산과 수많은 집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산불이 완전히 진화될는지. . .
우리가 떠나온 고국에선 전쟁의 공포가 어느 때보다 증폭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주엔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한국에 파병된 미국인 가정들을 어서 속히 미국으로 소환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한반도 전쟁 공포감을 조성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죠?
그래서 요즘 들어서, 평화를 노래하기보단 오히려 이런 노래가 우리 입술에서 떠나가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 .” (통합찬송가 474)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천사들이 노래를 잘못 선정한 것은 아닐까요?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 보좌 옆에 머물던 탓에 그들이 이 세상 실정을 잘 모른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있잖아요. 천군천사들은 노래를 잘못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불러야 할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한 그들이 불렀던 노래가사는 구구절절이 옳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이겠지요.
이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혹시 우리가 갖고 있는 평화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평화를 그릇된 곳에서 찾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껏 평화를 누리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게 아닐까요?”
흔히들 우리가 갖고 있는 평화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평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 (네이버 국어사전).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평화의 개념을 다르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누리는 올바른 관계이다.”
미리암-웹스터 영어사전이 제시하고 있는 평화의 셋째 개념이 성경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평화: 개인적 관계에서 화합/조화.”
그렇습니다.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평화는 우리가 예수님과 누리는 관계성입니다.
평화에 관한 가장 성서적 설명은 엡 2:14-17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에 모셔 들이고, 그의 통치 아래 머물 때 비로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렇게 간단히 정의합니다. “우리의 평화는 예수님이시다.”
평화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14:27).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께서도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2:14).
흔히들 평화에 관해 말할 때, 폭력이나 전쟁이 없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가 평화롭다 말할 때, 그곳에 전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엡 2:14-17을 생각해 보건대, 평화에 관한 개념을 좀더 신중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성경이 가르칠 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던 때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5:10). 물론 이 원수관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물론 그들의 후손까지 포함해서)가 불순종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 믿는 자들은 원수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 관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어원을 살펴보노라면, “평화는 조합/연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 것입니다 ( 2:1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5; 8:15, 16).
참고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 창피하다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분리, 곧 멀어짐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정죄하기에 숱한 문제가 우리 가운데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에 참으로 복된 소식이 선포되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평화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군천사들처럼 우리 역시 평화를 노래합니다. 비록 거센 풍랑 속에 우리가 거한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죽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결코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우리 역시 이렇게 외칩니다. “평화! 우리 가운데 평화! 온 땅 위에 평화!”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은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과거의 놀라운 이적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임합니다.
죽음의 세계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임한 평화 때문에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 주, 구원자로 고백하고서 구원의 선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16:33).
예수께서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통치 아래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서 평화를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해안가 바위와 맞부딪칩니다. 번개가 치고, 요란스런 천둥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람은 거세게 붑니다. 하지만 바위 틈 안에 작은 한 마리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 어린 것의 머리와 몸이 어미 새의 날개로 덮여 있기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습니다.”    
매튜 헨리 목사께서 평화를 이렇게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안전은 위험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톨스토이는 원래 러시아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의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저술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죄의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 농부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화로웠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그에게 다가가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톨스토이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런 후 그의 마음이 죄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찬송가(통합 474)는 이렇게 이어지죠?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하지만)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제 대강절 둘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 모두 마음에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가 가득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나의 평화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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