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1, 2017

사랑으로 한 해를 마감합시다





사랑으로 한 해를 마감합시다
요일 3:11-20 (20171231. 주일예배)
하나님의 사랑
중세기에 어느 한 수도사가 다음 주일 저녁 미사 설교제목은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이라고 미리 광고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저녁 미사를 드리려 회중이 성전으로 들어섰는데 다른 날과는 달리 제단이 굉장히 어두웠습니다. 제단 위 촛불도 켜져 있지 않았습니다.
설교시간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수도사가 제단 위의 촛대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촛대를 십자가 위쪽으로 들어올렸습니다. 그러자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촛대를 옆쪽으로 옮기자 못 박힌 예수님의 두 손이 드러났습니다.
그런 이후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래쪽으로 가져가자 회중은 예수님의 못 박힌 두 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후 촛불을 끄고서 제단을 내려오더니 수도승은 조용히 밖으로 가버렸습니다.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폐회를 알린다는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그날 저녁설교와 미사가 끝났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줌으로써 그 수도사는 회중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을 끊임없이 표현하셨습니다. 사실 천지창조 후 골고다 위에 우뚝 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선명히 표현된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셔야 했을까? 얼마나 간절히 나처럼 못난 인간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해내고 싶으셨으면,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울부짖는 아들의 외침마저 외면하셔야 했을까?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버지의 가슴을 찢고 또 찢었을 텐데. . .  도대체 나란 인간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웠으면. . .”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그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까? 또한 아들의 울부짖음을 듣고서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이 느껴집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으면, 하나님께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혼이었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가 십자가 위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마저 묵묵히 지켜보셔야 했을까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란 여류 찬송 작가는 잦은 질병으로 고통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서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담긴 그녀의 찬송시는 수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녀가 작곡한 수많은 찬송 중에서도 통합 144장은 특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1)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2)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 죽였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조건부 사랑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이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베풀어졌습니다. 모두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호의를 받을 만했기에 주어진 게 아니고, 우리가 의로웠기에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베풀어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5:5, 6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백성은 십자가에서 완벽히 제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신 우리 자신을 우리 역시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물론 금년 한 해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노라면 후회스럽고 아쉬운 면도 많았겠지만,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이 정도 했으면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온 우리 자신을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서, 그 사랑을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같은 날엔 더더욱. . . 성도 여러분, 이렇게 여러분 자신에게 말해주기 바랍니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단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가족 구성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물론 금년 한 해 동안 살을 비비고 살아오면서 서로 의견이 달랐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얄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은 그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쉬워도, 얄미워도, 이해하기 힘들다 해도,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가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껴안아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가족을 있는 그대로 껴안아주지 않으면, 누가 그들을 껴안아주겠습니까?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안에서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20세기말의 교회란 책에서교회는 죽어가는 문화 속에서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덕을 세울 수 없고, 오히려 분열만 있습니다. 교회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 또한 주장하고 싶은 것마저도 때론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가 요구됩니다.
사도행전을 펼쳐보노라면, 초대교회에는 화려한 건물이나 잘 조직된 부서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두 눈으로 목격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격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꼈던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은 자신들의 말로써, 그리고 구체적인 구제활동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허다한 무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제스 무디라는 분은사람들은 행동이 있는 곳으로가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교회에 적용시키면, 사람들은 사랑이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훌륭하게 준비된 수많은 프로그램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프로그램에 식상하면, 그런 교회를 떠나갑니다. 하지만 교회에 사랑이 있으면, 설령 프로그램이 부족하고 시설이 미비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합니다.
어떤 허물이나 부족하고 미비한 부분마저 덮어주는 능력을 사랑은 품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바로 이런 사랑이 있었으면 합니다.
전도할 때, “우리교회 안에는 잘 짜인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또는우리교회는 주차장도 넓고, 교육 시설도 좋습니다라고 자랑하기보단우리교회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와서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전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적극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게 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십시오라고 말하기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돌립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한 자들이 사랑의 행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기에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전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스콧틀랜드에서 태어난 로버트 모리슨(1782-1834)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얼마나 말썽을 부렸든지 주변 사람들이구제불능의 저질이란 별명을 그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그리스도인이 그 소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강한 열정을 가지고, 그 소년에게 옷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옷을 받자마자 모리슨은 즉시 찢어버렸습니다. 다시 새 옷을 사주었더니, 그것마저 찢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리스도인은 모리슨에게 또 다시 새 옷을 사주었습니다. 모리슨은 그 사람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서 그를 좇아 주일학교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며 모리슨의 신앙은 날이면 날마다 커져 갔고, 결국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남에게 전하고자 선교사역에 헌신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중국선교의 꿈을 품고서 열심히 중국어를 학습했습니다. 결국 그는 중국어 사전과 성경을 출간했고, 중국선교 개척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테레사 수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매듭 짓고자 합니다.
1946 910일 테레사 수녀는 칼커타에서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소위 그녀가 말한 부르심으로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 영감은 새로운 사역을 위한 확실한 목적과 소명을 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그리고 사랑과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무한한 목마름을 해소시켜드리기 위한사역입니다. 그래서 결국 1950 10 7, “자선 선교단(Missionaries of Charity)”란 새로운 선교단체가 캘커타 대교구 안에 공식적으로 태어났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다음의 이야기 하나를 들려 줍니다.
어느 날 나는 하수구에서 한 남자를 꺼냈습니다. 그의 몸은 벌레가 우글거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동물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랑을 받고 관심 속에서 천사처럼 죽어가는군요" 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를 깨끗이 씻기는 데 무려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수녀님, 나는 이제 주님 계시는 집으로 갑니다." 그러고 죽었습니다.
나는 한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빛나는 미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양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대단한 존재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살리고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로 삼아주셨기에 우리의 존재가 소중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보건대, 우리가 대단한 존재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신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도 축복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남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2017년을 사랑의 마음으로 마무리 짓고, 다가오는 2018년을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즐겁고 희망찬 새해 되길 바랍니다.

Friday, December 29, 2017

2018년 새 달력과 함께 걸어두는 기도



2018년 새 달력과 함께 걸어두는 기도
삶을 여민 옷깃 속에서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위하여
나보다 더 괴로운 사람을 위하여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깊고 처절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마음 하나 걸어 두자.
아침의 맑고 진정한 작은 마음의 기도를
응답하는 이가 들으리니
오늘 하루 사립 밖 움츠린 거리에
간절한 마음의 작은 촛불 하나 걸어두자.
이것은 정순영 시인이 쓴 착한 마음 하나 걸어두자란 시 중간 부분에 실려 있는 시구(詩句)입니다.
내일이 되면, 정들었던 금년 달력을 떼어내고 새로운 달력을 벽에 걸고서 새해를 맞게 됩니다. 닭의 해였던 2017(丁酉年)은 안팎으로 유난히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났기에, 그런 기상천외한 일도 현실화 될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오래 동안 정석으로 믿어졌던 것이 단순히 부정될 뿐만 아니라 거짓으로 몰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너무 자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욕심이 불러온 자연적 재해는 유래가 없을 만큼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달력을 벽에 달고서 새해 첫 날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달력을 벽에 붙인다고 해서 정유년의 다사다난한 기운이 동시와 떠나가진 않을 것입니다. 아니 다가오는 2018(戊戌年)은 더욱더 다사다난할지도 모릅니다. 정유년에 일어난 괴상천외(奇想天外)한 숱한 일이 빚어낸 결과가 반드시 뒤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달력을 벽에 걸면서도 왠지 마음이 편친 않습니다. 내년엔 상상을 초월한 일을 더욱 자주 목격하게 되진 않을까 싶은 염려부터 앞서기도 합니다.

특별히 2018년엔 우리교회 역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의 요구 속에서 만만치 않게 요동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달력을 벽에 걸면서 그와 동시에 기도하는 마음도 함께 걸어두려 합니다. 새해 첫 주간엔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특별히 새해 둘째와 셋째 날엔 멀리 홀로 떠나가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주님의 교회가 맞게 될 숱한 새로운 도전을 위해. 무엇보다, 기도 가운데 주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좀더 깊게 헤아리려 합니다


Thursday, December 28, 2017

꺼내야 할 선물 (4): 사랑




꺼내야 할 선물 (4): 사랑
1:18-25; 3:16-17 (2017 12 24. 성탄주일)
이철환 씨가 쓴 연탄길이란 책은 작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작가가 입시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친구들, 또한 이웃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책에 이런 감동스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남부러울 데가 없을 것 같은 이 여자는 큰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눈썹이 없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약점을 감추기 위해,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늘 편치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해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따뜻하기 만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게 되고, 그래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라 와서,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댕이투성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닦아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킬까 봐,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자는 깨달았지요. 남편이 자기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남편에 대한 감동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남편은 그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면서,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까먹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상대방을 짜증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이것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내가 당신을 필요로 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한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오랜 친구와 싸우고 등을 돌리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지독한 공산주의 도그마에 갇혀 있던 철학자 사르트르 역시도 이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그가 이런 고백을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서로 잘못 사랑했다!”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방법을 아십니다.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리고 그의 사랑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자,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는 사랑이시기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할 때, 그 사랑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합니다. 예로 들면,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원한다든지, 그로부터 위로를 원한다든지. . . 곧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추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노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곧 온전히 배타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3:16, 17)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 사건이 아닙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서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역사적 사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이 세상에 임한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1:21)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사람을 묶어두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묶고 있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포기하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를 얽어 매는 멍에는 예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을 때 이미 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8:1, 2)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 역시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결코 우리를 헤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우리로부터 무엇을 바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욱더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실 뿐입니다. 어떤 전제조건도 달지 않으신 채 말입니다.
성탄절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또한 앞으로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을 것인지. . .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기에 그가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마움을 표시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관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이렇게 확증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5:8).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 앞으로, 그분의 은혜 앞으로, 그분의 평화 앞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12:1, 2).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과감히 벗어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해, 그분의 사랑 앞으로 힘써 달려가야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에 있어 최상의 행복은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전적으로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했으면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참된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그분의 아들이 우리에게로 찾아오신 이유를.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아들을 믿고 그를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 그리고 주님으로 영접하노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1:12).

성도 여러분, 오늘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드리지 않으시렵니까?

Friday, December 22, 2017

성탄절 나무 전통 유래


성탄절 나무 전통 유래

매년 대강절 장식에 들어가며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성탄절 나무(크리스마스 트리)입니다. 가능하면 인조보단 생나무를 선호하는데, 그것의 독특한 향 때문입니다. 구입 후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강하게 풍겨나는 향내는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내가 어느 곳에서 목회하던 성탄절 나무를 기증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하와이에서 목회할 땐 20년 넘도록 그것을 기증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연세가 지극히 들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시기까지. 그녀의 남편이 살아생전엔 나무를 직접 골라 트럭에 싣고 교회로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부임했을 땐, 그 남편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후였던 고로 다른 성도가 대신 날라다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무 비용만큼은 그 할머니 성도께서 반드시 지불하셨습니다. 성탄절 나무를 교회에 기증하는 고귀한 특권을 결코 놓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곳 사랑나무교회에서도 매년마다 성탄절 나무를 교회에 기증하는 것을 큰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기는 분이 계시기에 그분의 따뜻한 마음 때문에 훌륭한 향내와 모양을 지닌 성탄절 나무를 성전에 세울 수 있습니다. 목회지면을 빌려 매년 성탄절 나무를 기증하신 성도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성탄절 나무(크리스마스 트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사실 이 전통은 초대교회 때부터 유래된 게 아닙니다. 역사적 근원을 아무리 빨리 찾아도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발견된 가장 빠른 문헌은 1419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제빵사들이 무숙자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던 건물 앞에 나무를 세웠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나무 세우기 전통이 독일 이외 여러 곳으로 전파된 것은 아무래도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의 공로가 컸습니다. 1521년 성탄절 전날 밤 산책하던 중 달빛에 비친 전나무에 유난히 그의 시선이 끌렸습니다. 하얀 눈이 전나무 가지 위에 소복이 쌓인 관계로 쌓인 눈이 달빛을 반사시켜 주변을 상대적으로 환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가 깨달았습니다. 비록 우리 인간은 어둠 속의 초라한 전나무와 같지만, 주님의 환한 빛을 받으면, 주변에 아름다운 빛을 비추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나무를 가져온 루터는 솜과 반짝이는 리본과 촛불을 그것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의의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하긴 세계 1차 대전 당시에도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에 성탄절 나무가 세워졌다고 하죠? 전쟁이 한창이긴 하지만 성탄절 하루만큼은 휴전하자고 그곳의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이 동의했습니다. 그런 후 성탄절 나무를 세우고 나무 주변으로 병사들이 모여 성탄 캐롤을 부르고 맥주를 마시며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물론 각국의 사령부는 상부로부터 허락도 없이 그런 위험한 결정을 내린 병사들을 문책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문책 조건이 되었어야 헸는지 나는 의아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구주께서 탄생한 날이기에 그날만큼은 국적을 초월하여 모두가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O Christmas Tree


O Christmas tree, o Christmas tree
How lovely are thy branches
O Christmas tree, o Christmas tree
How lovely are thy branches
Your boughs so green in summertime
Stay bravely green in wintertime
O tannenbaum, o Christmas tree
How lovely are thy branches
Let us all remember
In our gift giving and our merriment
With our family and friends and loved ones
The real and true meaning of Christmas
The birth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O tannenbaum, o tannenbaum
How lovely are, are thy branches
O tannenbaum, o tannenbaum
How lovely are, how lovely are thy branches
The pillars all please faithfully
Our trust in God unchangedly
O tannenbaum, o tannenbaum 

How love, lovely are thy branches
On Comet, on Cupid, on Donder and Blitzen
Ha ha ha ha
작사: Bruce L Fowler / Traditional / Pd Traditional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13:1-17 (2017 1220일 수요예배)
첫째 아들이 어렸을 때, "얼마나 아빠를 사랑해요?"라고 물으면, 자기 팔을 최대한 앞으로 내어 밀고 나서 다시 뒤로 젖힙니다. 그리고 큰 원을 만들며 "이만큼 사랑해요"라고 말해주곤 했습니다. 그것이 아빠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런 행동을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물론 나 역시도 발을 쭉 내밀어 뒤로 젖히며 "아빠도 찬우를 이만큼 사랑해요"라고 화답해 주었지요.
그런데 언제나 그 녀석이 손을 쭉 내밀고 뒤로 크게 젖히며 "아빠, 아빠를 이만큼 사랑해요"라고 말해주진 않았습니다. 언젠가부터 화가 나 있으면 절대로 그런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Daddy, you are not my buddy (아빠, 아빠는 나의 친구가 아니에요)." 물론 찬우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화가 나 있음을 알리려 한 것이지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섭섭해지던지. . .
우리 인간은 부모자식의 관계에서도 제한적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물며 친구나 이성관계에서 사랑은 제한성이 너무나 큽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네가 없으면,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고백하고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바뀌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돌아서고 맙니다. 헤어진 후엔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하지요.
사무엘하 13장에 보면,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각각 다윗 왕의 아들과 딸이지만 배가 다른 이복형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암논이 이복 동생 다말을 짝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다말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심해 결국 병을 얻기에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면 병을 얻게 될까요? 다말을 너무나 사랑한 암논은 그녀와 시간을 보내길 소원했습니다. 결국 꾀를 내어 자기 병실로 다말이 찾아오도록 하지요.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다말로부터 병간호를 맡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말을 향한 사랑을 강간이란 부정적인 행동으로 표현하고야 말지요.
그런데 다말을 강간하고 난 이후 암논이 그녀를 보노라니 그녀가 그토록 밉상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다말을 향한 암논의 미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삼상 13:15)
바로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좋을 때는 한참 좋다가도 싫어지면 원수보다 더 싫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인간의 제한적 사랑을 초월한 무척 숭고한 한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향하신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자기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변치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에서, 오늘 본문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 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번역하노라면 이렇습니다. "이제 유월절 하루 전날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 이르렀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남겨질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끝없음을 보여 주길 원하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이란 하나님께서 예수께 맡기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선 그들과 3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뒹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 자신을 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마지막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서께선 그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어떠하던 그들을 향한 예수께서 품고 계신 사랑의 깊이를 좌우하진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사랑했기에,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끝까지 그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자기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께 맡기신 무척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제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한결같았듯,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도 무조건적이고 한결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난 모든 이들의 관심 밖에 있어. 내게 관심을 주고 돌보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어"고 생각하진 않는지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세상은 비록 여러분을 버린다고 해도 예수께선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선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한결같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무척 사랑했기에 이제 그들을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께서 그들을 떠난다는 말은 그들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남기 위해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그의 제들이 감당해야 할 죄악의 대가인 십자가를 예수께서 스스로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겠다고 결단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예수께선 자기 사람들에게 평소에 꼭 들려주고 싶었던 교훈을 전하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 13장부터 17장까진 예수님의 유언장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긴 한평생 불효막심했던 아들 청개구리도 어머니가 남긴 유언은 순종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가 예수님의 유언을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랑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준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발을 친히 씻기며 섬겼듯, 제자들로 서로의 발을 씻기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곧 섬김의 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둘렀던 수건으로 닦길 시작하셨습니다.
글쎄 누구의 발부터 씻겼는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가룟 유다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제자들 중 수장인 시몬 베드로의 발부터 씻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겐 예수께서 누구의 발을 먼저 씻기셨나 하는 것은 큰 관심사가 아닙니다. 나의 관심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 모두의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발을 내어 미는 제자들의 발뿐만 아니라 내어 밀길 꺼려하는 제자들의 발까지, 물론 자기 자신을 팔아 넘길 계획을 이미 세워둔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으셨습니다.
물론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그의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미리 집어 넣으셨음을 예수께선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으셨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 . 목회하는 동안 나에 관해 악성 루머를 만들어 퍼뜨리거나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는 것도 쉽지 않던데. . .
그날 저녁 세족식 현장을 생각할 때면, 나는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주시며 민망한 심정에 사로잡혀 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토록 사랑을 주며 가르쳤건만 끝내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 작정을 이미 끝낸 제자의 발을 씻노라니 무척이나 "심령이 민망"(21)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를 향한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그의 발을 정성껏 씻겨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며 참다운 사랑이 무엇이고, 섬김이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친히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선 바로 이것을 그의 제자들과 오늘날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신 이후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4).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발을 씻어주신 것을 믿습니까? 곧 예수께서 그의 보혈의 피로 여러분의 죄를 온전히 씻어주셨음을 믿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가 이것을 믿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타인의 발을 씻기길 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
타인의 발을 씻길 때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섬김에 관한 말씀을 계속 잇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섬김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 앉아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현재 자리에선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섬김 받는 자리에 앉아선 결코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타인을 섬기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겉옷을 벗고: 남을 섬기고자 일어났다면, 이제 남의 발을 씻기 위해 거추장스런 옷부터 벗어야 합니다. 자기 신분을 드러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채 결코 남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옷을 입은 채 섬기려 하면, 섬김 받는 사람이 오히려 도망칩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우리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생각을 유지한 채 결코 타인을 섬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을 섬기려면,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에,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하셨던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몸을 입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영광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와 같은 위치에 서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6-8).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타인의 발을 씻기고자 결단했다면, 이제 타인의 발을 씻기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 물을 대야에 담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남의 발을 씻어주겠다고 하겠노라 결단했다면, 우리는 남이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찾아나셔야 합니다. 수건이 준비되고, 대야에 물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때 섬김을 베풀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이 아니라 보여주기에 불과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섬김을 위해 필요한 것이 준비되었다면, 이제 타인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타인의 머리만 씻기는 것이 아니라 발까지 씻어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하기 싫은 것까지 기꺼이 해야 합니다. 물론 건성으로 씻기지 말아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씻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명령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유언대로 우리도 섬김을 베풀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섬기셨듯, 우리도 남을 섬기길 원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아멘.

함께 부를 찬송: “날 대속하신 예수께” (통합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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