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28, 2016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우선순위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서 우선순위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10:23). 영생 얻는 법을 알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낭패를 보고서 슬픈 기색을 띠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나가는 청년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시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염려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재물이 많으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인가?”

실은 예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물질관과 신앙관에 관한 것입니다. 물질과 신앙,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 어느 것이 삶의 우선순위인지 분명히 하라는 도전입니다.

예수께서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 10:21).

그 청년이 부자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물질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포기하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갖고 있는 재물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청년의 생각이었습니다. 숱한 좋은 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물질의 벽은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지고 있는 물질은 너무나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곳에 둘 것인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확실히 정리되어야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를 우선적으로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을 먼저 사랑할 것인가?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사랑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으면,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고,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동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에 큰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4). 물질은 가정의 필요를 채우고, 주변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주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축복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Friday, October 21, 2016

하루살이에게도 생의 철학이 있다


하루살이에게도 생의 철학이 있다
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하루살이에 관해 아는 대로 말해보세요.” 그러자 아내의 대답은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다였습니다. “내일이 없기에 오늘을 내일처럼 산다는 부연설명까지 친절히 붙였습니다. 짧지만 매우 굵은 답변이었습니다.
간혹 우린 하루살이의 생애를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의 수명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하루살이를 아침에 태어났다 저녁에 죽어버리는 곤충으로 알고 있기에 하루 벌어 그날 먹고 살아가는 사람을 빗대어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루살이의 삶이 정말로 비아냥거릴 성질의 것일까요? 과연 우린 하루살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하루살이에 관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하루살이의 생애는 하루가 아니라 사실은 평균 1, 혹은 최대 3년입니다. 유충으로 최대 3년까지 살아가는데, 습지에서 빠져 나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간이 하루 정도입니다. 곧 성충으로 지내는 기간이 대략 하루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루살이 수명을 하루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습지에서 보낸 숱한 시간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에.
또한 어떤 하루살이 성충은 3, 4일까지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성충으로써 하루살이의 생애는 그곳 기후나 먹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생애 거의 대부분을 유충 상태로 습지에서 보내다 성충이 된 후 물 밖으로 나와 교미하고서 곧바로 삶을 마감합니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보건대, 하루살이는 하루 인생이 아닙니다. 단지 성충으로써 평균 하루 시간을 보낼 뿐입니다. 마지막 순간, 곧 최후의 생애를 참으로 멋지고 우아한 모습으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다 사랑의 대상을 만나면 마음껏 사랑을 나눈 후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하루살이야말로 참으로 멋진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루살이 인생이란 비아냥거림 대상이 되긴 너무 애달프고 또한 장엄하지 않습니까
하루살이에게도 생의 철학이 있습니다. 기나긴 시간을 습지에서 준비하고 기다리다 성충으로서 주어진 하루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후 장엄히 생을 졸업합니다. 비록 성충으로써 하루 시간만 주어질 뿐이지만 하루살이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길수도, 짧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자기 생을 길게 느끼기도 하고, 짧게 느끼기도 하듯.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의 길고 짧음이 아닌 그것을 얼마나 유익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곧 살아가는 생의 길이가 아닌 생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우리 인간이 하찮게 취급하는 매우 조그마한 미물 하루살이로부터 배워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굳은 자세를. 또한 삶을 사랑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쉴 새 없이 투혼을 불태우며 살아가려는 부단한 노력과 의지를

Friday, October 14, 2016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밥 딜린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밥 딜린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엄청난 부를 창조한 스웨덴 과학자 알프레드 노벨이 남긴 유산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생리의학, 물리학, 화학, 평화, 문학, 경제학 등 여섯 분야에서 그 해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인물을 택해 상패와 함께 상금 800만크로나를 시상합니다. 1901년부터 시작된 이 상은 역사가 깊어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됩니다.
물론 수상자 모두가 동일한 관심과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 옳을 것이나, 유난히 도서에 욕심이 많은 내겐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게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 노벨 문학상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 발표 직전까진 수상자 이름이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어 추측이 난무합니다. 하긴 노벨상 수상 후보를 두고 도박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영국의 명성 높은 도박 전문업체 래드브록스(Ladbrokes)도 노벨상 수상자들을 두고 온라인 도박사업에 뛰어들었을 정도입니다.
금년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자로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 미국 현대문학 거장 필립 로스, 케냐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 알바니아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 속했습니다. 물론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 고은의 이름도 거론되었습니다.  
하지만 금번 노벨상 위원회는 뜻밖의 수상자를 선정했는데, 바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Bob Dylan)입니다.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적법성을 두고 의견이 분부합니다. “밥 딜런이 시인인가, 가수인가?” “그가 쓴 글이 유행가 가사인가, 순수 문학 싯구인가?”


하긴 1965 1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졌던 열린 기자회견에서 스스로를 가수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시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밥 딜런은 이렇게 회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냥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림원은 그를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한시인으로 평가했습니다.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여부를 두고서 여러 의견이 분부하나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은 문학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한림원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순수문학이란 틀에 갇혀 세상과 동화되지 못하고 자기 틀에 갇혀 있는 수많은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아픔을 대변하라고 외치는 듯합니다.

또한 한림원의 외침이 내 귀에 이렇게 들려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Wednesday, October 12, 2016

Picnic Sunday

Picnic Sunday
(Oct 9, 2016)



















Friday, October 7, 2016

우리는 화해의 대사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화해의 대사로 부름 받았다
옛날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랫동안 반목관계를 유지해오던 두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싸우다간 양국이 동시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지혜로운 선비 하나가 두 나라 사이에 화해의 다리를 놓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쪽 나라 왕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유해 말하건대, 이 나라는 만월 같고, 저 나라는 초생달 같습니다. 큰 나라가 되어서 굳이 조그마한 나라를 왜 치려고 하십니까?” 그 선비의 듣자니 왕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서 전쟁을 멈추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만두지 뭐!”
그런 후 그 선비가 상대방 나라의 왕에게 찾아가 이렇게 고했습니다. “비유해 말하건대, 저 나라는 만월 같고, 이 나라는 초생달 같습니다. 초생달 같은 나라가 굳이 만월 같은 나라를 왜 치려고 하십니까?”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불끈 화를 내면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뭐라고? 그 나라는 만월이고, 우리는 초생달이라고? 이 자가 우리를 무시하는구먼!” 그때 선비의 대답이 이러했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만월은 이제부터 기울 것이고, 초생달은 이제부터 커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가 왕의 나라를 무시한 것입니까?” 그 해명을 듣고서야 왕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고, 이렇게 말하며 전쟁을 즉시 멈추었습니다. “, 그러하겠구먼! 그럼 우리가 전쟁을 그만 두어야지!”
두 나라 왕을 찾아갔던 선비는 사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두 나라의 화목을 위해 도모하기 위해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왕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떤 말이라도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뜻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말하는 자의 소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말에도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 말을 듣고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9:50). 또한 이렇게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5:24).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은 화해와 화목사역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는 화해의 대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 19). 우리 모두 이 사역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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